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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나의 선택 나의 패션 41. 프랭크 시내트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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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1956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마차를 타고 관광하는 필자.

요즘도 크게 다를 바 없으나 1950년대 스페인 마드리드의 패션은 파리나 뉴욕에 비해 아주 뒤떨어진 편이었다. 하지만 내가 가장 존경하는 디자이너인 크리스토벌 발렌시아가와 크리스티앙 디오르 사후 그 뒤를 이은 이브 생 로랑은 스페인 출신이다. 두 사람 모두 천재적인 독창성을 지니고 있었다. 요즘 젊은 디자이너들이 발표하는 대부분의 스타일이 크리스토벌 발렌시아가가 이미 그 시대에 만들어냈던 걸 응용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나는 여름 한철 두 달여 동안 바캉스를 떠나는 파리 시민처럼 방학을 이용해 스페인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파리에서 알고 지내던 무슈 B와 함께 동행하게 되었다.

우리는 열정적인 투우 경기장을 거쳐 스페인의 명물인 플라멩코를 보러 클럽에 갔다. 무대에선 우리의 '창(唱)'과 비슷한 노래를 남녀가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고 앉아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일어나 발로 바닥을 치면서 캐스터네츠로 리듬을 맞추고 주름진 치마를 흔들면서 빙빙 돌기 시작했다. 흥겹고 열정적인 무대에 혼을 빼앗긴 채 무대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문득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곳을 봤다.

나는 눈을 의심했다. 유명한 가수이자 배우인 프랭크 시내트라가 막 자리에 앉는 게 아닌가. 그의 달콤하고도 섹시한 음성, 그가 부르던 노래들이 순간적으로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인기 스타를 훔쳐 보는 촌티를 안 내려고 설레는 마음을 꾹 누르고 태연한 척 했다.

플라멩코가 끝난 뒤 우리는 밖으로 나왔고, 무슈 B가 택시를 잡으러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리고 내 옆에는 꽃 파는 집시 아주머니가 있었다. 뒤이어 나온 시내트라가 꽃 파는 아주머니 앞으로 가더니 빨간 장미 두 송이를 사 들고는 내게로 곧바로 다가왔다. 가슴이 뛰었다.

"미스, 이것을 당신에게"하며 건네는게 아닌가. 너무나 뜻밖의 일에 놀라며 "고마워요"하고 꽃을 받았다.

"당신은 어디서 왔죠?" 그는 내 얼굴을 응시하며 이렇게 물었다.

"제 본래 고향을 물으시는 건가요, 아니면 근래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시는 건가요. 저는 본래 한국에서 왔고, 이곳에는 파리로부터 왔어요"라고 대답했다.

시내트라는 그 큰 눈을 껌벅거리며 신기하다는 표정이었다. 당시 한국이라면 누구나 한국전쟁이나 피란민을 떠올렸을 테니 그럴만도 했다.

마침 무슈 B가 택시를 잡아 왔고, 시내트라의 보디가드 역시 빨간색 스포츠카를 몰고 와서 시내트라에게 타라고 손짓했다. 나는 무슈 B에게 한쪽 눈을 깜박거리며 미리 약속했던 신호를 보냈다. 내가 눈을 깜박이면 무슈 B는 곧바로 내 주변에서 사라지기로 여행을 떠나기 전에 약속했었다. 그러나 그는 알고도 그러는 것인지 정말로 그 신호를 잊었는지 "미스 노, 늦었으니 어서 가시죠"하고 재촉했다.

일행으로 보이는 남자가 나타나자 시내트라는 아쉬운 얼굴로 내게 간단한 작별 인사를 하고는 멋진 스포츠카에 올랐다.

노라 ·노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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