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제왕' 이창호 레임덕 갈림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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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이창호 9단에게 힘든'1월'이 다시 찾아왔다. 이 9단은 지난해 1월의 삼성화재배 결승에서 중국의 뤄시허(羅洗河) 9단에게 패배했고 그 여파 탓인지 국제무대에서 일 년 내내 힘든 시간을 보낸 끝에 '무관'에 그치고 말았다.

이 9단은 올해 다시 삼성화재배 세계오픈(우승상금 2억원) 결승에 올랐고 상대만 뤄시허에서 창하오(常昊) 9단으로 바뀌었다.

뤄시허든 창하오든 예전 같으면 무슨 걱정이 있으랴. 하지만 프로기사들이 5000년 바둑 사상 최강자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 이창호도 세월의 힘 앞에 조금씩 위력이 줄어들고 있는 게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다. 오랜 물줄기에 바위가 조금씩 깎이듯 이창호의 힘도 그렇게 깎여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창하오는 조금씩 소생하더니 이젠 완전히 중국의 중심 기사로 자리 잡았다. 창하오는 이창호와 1997년부터 2004년까지 7년간 주요 관문에서 15번 격돌하여 13번을 졌고 2001년 삼성화재배 준결승과 2006년의 강원랜드배에서 단 두 번을 이겼을 뿐이다(대국 수로 계산하면 26전 6승20패). 세계대회 결승전에선 세 번 만나 모두 이창호 9단에게 졌고 준결승에선 1승 1패다.

하지만 창하오는 2년 전 응씨배 우승으로 다시 살아나 중국 강세를 이끌기 시작했고 지난해 춘란배에 이어 삼성화재배 결승에 진출하면서 올해 새로 발표된 랭킹을 보면 14위에서 5위까지 수직 상승했다.

창하오는 이렇게 말한다. "바닥까지 굴러 떨어져 많은 좌절을 맛보았지만 그 좌절을 통해 나는 정신적으로 많은 것을 얻었다. 이젠 큰 승부를 할 때 예전과 다른 자신감을 갖게 됐고 무념의 승부를 즐길 수 있게 됐다."

이런 분위기를 고려하면 이번 1월은 이창호 9단에게 버거운 시련일 수 있다. 이번 승부를 이긴다면 이창호는 천부의 감각을 다시 추슬러 자신의 바둑 세계를 완성하는 큰 걸음을 새롭게 떼어놓을 수 있다. 그러나 패배한다면 '바둑의 제왕' 이창호 9단의 '레임덕'이 시작될 수 있다.

다른 기사들은 세계기전의 결승 무대를 꿈의 무대라며 한 번 올라갈 수 있기를 소원하지만 이창호에겐 이번 삼성화재배 결승전이 피말리는 시련이고 위기일 수 있는 이유가 여기 있다.

3번기로 펼쳐지는 결승전은 22일(1국), 24일(2국), 25일(3국) 상하이(上海)에서 열린다. 다음은 이창호 9단과의 일문일답.

-삼성화재배 결승전에 임하는 소감을 말해 달라.

"오랜만에 창하오 9단과 결승전을 두게 됐다. 창하오와는 친한 사이고 그래서 편한 마음으로 둘 생각이다."

-창하오 9단과 개인적으로 가까운 편인가.

"지난번 동생 결혼식 때도 창하오와 만났다. 창하오는 나보다 한 살 어리지만 인품도 훌륭하다고 느끼고 있다. 좋은 바둑을 둘 수 있기를 바란다."(중국에 거주하는 이창호 9단의 동생 영호(30)씨는 14일 베이징에서 중국 여성 류신위(29)씨와 결혼식을 올렸다. 이때 이창호는 하객으로 온 창하오와 만났다.)

-지난해 1월 첫 세계대회 결승인 삼성화재배에서 뤄시허에게 진 이후 결국 세계대회 무관에 그쳤다. 다시 똑같은 상황인데 부담감은 없나.

"지난해 한국 바둑이 전체적으로 저조해 부담감을 느껴왔다. 다행히 이세돌 9단이 얼마 전 첫 우승을 해주는 바람에 조금 부담감을 덜게 됐다. 이번 승부를 이겨 2007년을 좋게 시작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박치문 전문기자

◆ 창하오 9단=1976년 상하이 생. 95년 전국개인전 등에서 연속 우승하며 중국 최강자로 떠올랐고 이창호 9단과 나이와 이름이 비슷하여 '중국의 이창호'로 불리게 됐다. '한국 타도'라는 중국 바둑의 기대와 염원을 어깨에 걸머진 창하오는 그러나 이창호와의 주요 대결에서 연전연패하며 스승인 녜웨이핑(衛平) 9단이나 그 뒤를 이은 마샤오춘(馬曉春) 9단이 그랬던 것처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듯 보였다.

그러나 창하오는 2005년 응씨배 결승에 오르며 기적처럼 다시 살아났고 이때 "응씨배를 만든 잉창치 선생의 영전에 우승컵을 바치고 싶다. 잉창치 선생은 중국 바둑을 위해 응씨배를 만들었으나 우리는 12년 동안 그에 보답하지 못했다"고 비장한 한마디를 남기더니 최철한 9단을 꺾고 기어이 우승컵을 안았다. 창하오의 선전 이후 중국 바둑은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고 창하오 역시 꾸준히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부인은 8년 연상의 여자 프로기사 장쉬안(張琁) 8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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