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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미에 가려진 죽음의 진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5면

우리는 어느새 죽음에 길들여져 가고 있다. 80년 광주 이후, 지금까지 우리 사회의 집단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억울한 죽음들에 대한 방관자로서의 속죄의식이다. 왜 죽음이 문제가 되는가. 죽음이 우리 사회의 중요한 화두로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삶에 대한 존재 확인의 의문점이 구조적으로 강렬해졌기 때문이다. 삶을 치열하게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죽음은 더 이상 삶의 끝 어딘가에서 불쑥 나타날 낯선 것이 아니다.
91년5월은 죽음의 달이었다. 강경대의 죽음 이후, 김귀정에 이르기까지 l2명의 목숨들이 우리 앞에 바쳐졌다. 그 죽음들은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집단을 위해서 바쳐졌다는 점에서 살아있는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다.
국제성 있는 한국 창작 무용의 신기원을 이룩할 것이라는 서울 시립무용단의 「떠도는 혼」(5월29∼30일·세종문화회관 대강당)을 보기 위해 대학로를 출발할 무렵 나는 한 떼의 학생들을 보았다. 그들은 현 정권을 비판하는 구호를 적은 커다란 검은 천과 깃발을 앞세우고, 며칠 전 대한극장 앞에서 시위도중 숨긴 김귀정의 영정을 든 채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또 다른 한쪽에서는 다른 젊은이들이 신나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두개의 서로 다른 외침이 공존하고 있는 세계, 서로가 서로를 표현하기 위하여 목소리를 높여 가는 세계 사이에 침묵하는 우리가 있다.
작품 「떠도는 혼」은 죽은자를 천도하기 위해 펼쳐지는 전통 굿의 하나인 「씻김굿」을 현대적 제의 형식으로 재해석하여 문명 사회의 모순 속에 억울하게 살다간 동시대의 수많은 영혼들과 살아 있는 많은 사람들의 아픔을 형상화하려 했다는 것이 제작진들의 주장이다.
배정혜 안무, 오태석 연출, 황병기 음악, 박동우 무대 미술 등 호화 스태프로 구성되어 있다. 배정혜 단장이 리을 무용단 시절, 지난 89년11월 공연했던 「혼에 누워 이 바다를」과 연관성을 가진 것이라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내 눈에는 오태석의 「떠도는 혼」으로 비쳐졌다.
그 이유는 배정혜의 안무보다 오태석의 공연 미학이 돋보였기 때문이다. 오태석은 시립 무용단의 풍부한 무용수들과 장치 지원, 무대 공간을 십분 활용하여 오히려 그가 이끄는 목화 팀의 연극 공연 때보다 양식적으로는 진일보한 무대를 보여주었다.
화려한 양식미가 무대를 압도한 이번 공연에서 그러나 나는, 죽음에 대한 현대적 해석을 읽을 수가 없었다. 경대나 귀정이로 보아도 무방할 억울한 주검들이 고통스럽게 무대를 뒹굴 때도, 또 빗자루에 물을 적셔 그 주검들을 씻겨 내리고 편안하게 저승으로 인도하려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안타까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91년5월 이 땅이 끄트머리에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현실감과 연결시켜주지 못한 것은, 죽음에 대한 성찰과 내적 진실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지 못한데 원인이 있다. 그것은 무대적 양식미에 지나치게 집착한 결과일 것이다. 어느 때보다 강한 현장감을 줄 수 있는 이번 공연이 단지 외양적 화려함과 신나는 굿판 정도로 다가온 이유는, 삶의 진실과 무대의 진실이 공감대를 형성하며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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