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버려야할 「기득권 고집」/김경동(시평)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명색이 지성의 최고 전당이라는 대학가에 혼란스럽게 나붙은 끔찍한 구호들을 날마다 대하며 지내기도 힘겨운 터에 요즘은 악화된 교통 사정 때문에 자주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면서 가끔 일부러 여론이나 들을까 해서 택시를 탄다. 그럴 때마다 운전기사들이 마구 쏟아 내는 욕설과 비방과 불평은 듣기가 너무 민망하여 도중에 내리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민심이 이토록 험악해지고 보니 너나없이 악에 받쳐 살든가,아니면 어처구니없는 무력감에 사로잡혀 체념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중병걸린 우리사회
이유와 목적이 무엇이든 사람을 개패듯하고 생명을 수단으로 여기는 풍조가 만연한 세상이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입만 벙긋하면 정치를 비롯하여 사회각계를 온통 싸잡아 비판하고 매도하는데 열중하고 모든 문제가 나와는 상관없고 전적으로 남의 탓이라고 삿대질이나 하는데 익숙해 있다. 만사에 나만 옳고 상대는 무조건 잘못되었다는 손가락질이나 일삼는 이 상태야말로 병이 들어도 중증에 다다랐다는 우려를 낳기에 충분하다.
스스로를 비판할줄 아는 사회가 발전의 가능성도 크다는 논리도 이제는 우리의 현실에 적용하기조차 수치스러운 지경에 이르렀으며,이런 자세로 나라의 장래를 염려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희화로 밖에 비치지 않는다. 지금의 우리가 날마다 어지러운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 휩쓸려 세력다툼으로 서로를 헐뜯으며 허송세월을 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는 이는 없을 것이다. 이 시점에서 급하고 중요한 것은 오히려 상호간의 차이와 이해득실을 과감히 접어두고 우리 사회가 나아갈 길을 보여주는 대안들을 찾아 내는데 온갖 지혜와 힘을 한데 모으는 일이다.
○허송세월 이젠 그만
그러자면 첫째로,기득권에 대한 끈질긴 집착에서 해방되는 일이 시급하다. 우리 국민이 그토록 갈구하는 개혁과 우리 사회가 이룩하여야 할 발전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 다름아닌 기득권의 고집이다. 이 자리에서 어떤 집단이 기득권에 세차게 매달려 우리의 전진을 방해하는지를 나열할 필요는 없다. 스스로 성실하게 성찰해보면 알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의도적이든 아니든 우리 사회의 혼란에 한몫을 하는 세력들은 독선과 아집에서 하루속히 탈각하는 일이 긴급하다. 이들이 누군가는 여기에서 일일이 지적하지 않기로 한다. 그들 역시 자신들의 모습을 객관화시켜놓고 진솔하게 살펴보면 알것이다.
셋째,우리사회에 불만과 원한으로 억울한 마음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 되도록 모두 사라질 수 있는 방향으로 서로가 나누고 감싸주며 더불어 사는 슬기와 마음가짐을 가꾸는 것이 또한 급선무다. 이런 자세는 먼저 힘있고 가진 사람들에게서 기대할 성질의 것이기는 하나,그렇더라도 불리한 처지에 있다고 무턱대고 불평과 원한을 품는 것이 반드시 정당한 태도만은 아니다.
특히 이 점과 관련하여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의 억울함과 한을 해소하는 일에 각별한 관심을 쏟을 필요가 있다. 흔히 사회적 갈등을 계급적인 관점에서만 보는 경향이 있지만,사실 많은 사회문제들의 근원에는 여성을 인간적으로 대우하지 않고 여성의 삶을 비인간화 하는 행태와 제도가 도사리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넷째,위의 조건들이 어느 정도 충족되었을 때 우리사회에 무섭게 번져 나가고 있는 일에 대한 왜곡된 태도가 바뀔 수 있다. 불로소득으로 일확천금이나 노리든가,일을 해도 쉽게 해서 큰돈 벌 궁리나 하는 자세로 가다가는 우리 경제의 앞날은 어둡기 짝이 없고,경제의 지속적인 성장 없이는 선진국이 되어 보겠다는 꿈은 애당초 헛된 일이다.
○부끄러운 정치문화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에서 하루 속히 졸업해야 할 잘못된 문화는 어떤 목적이나 이해관심이든 군집행동으로 단숨에 그것을 성취하려는 성향이다. 성숙한 민주 사회에서는 항상 최후 수단으로만 의지하되,평화적으로 치러야 하는 시위와 군중행동이 우리처럼 교육과 의식수준이 높은 국민을 가진 나라에서 폭력이 난무하는 가운데 날마다 일어난다. 지난 1960년 이래 햇수로 서른 두해째 한번도 거르지 않고 학원을 뒤흔들어 온 기록적인 역사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부끄러운 정치문화의 유산이다.
이제 이를 말끔히 청산하고 이성적이고 합법적인 민주사회,규칙과 절차를 목적과 주장만큼 중시하는 민주사회를 우리 세대에는 정착시켜야 한다.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불행한 사태를 모두가 반성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함께 탄 이 배가 어지러운 국제환경의 풍랑속에서 내부의 분열과 퇴영으로 난파당하는 비극을 맞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다짐을 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서울대교수·사회학>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