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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박물관 순례] 5. 고령 지산동 대가야 고분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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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나의 서부 경남 답사는 으레 행정구역을 넘어 경북 고령의 지산동 고분군에서 마무리하게 된다. 그것은 답사의 원칙이 절대로 온 길로 되돌아가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역사 문화권으로 볼 때 거창.합천.고령이 대가야의 영역이라는 점 때문이다. 영암사터를 떠나 삼가를 거쳐 합천에 이르면 고운 금모래사장으로 이름높은 황강(黃江)에 다다르게 된다.

강을 끼고 달리며 차창 밖으로 강변 들판이 아련히 펼쳐진다. 내가 함께 하는 답사객들에게 "바로 여기가 대가야 왕국의 경제적 터전이었답니다"라고 넌지시 알려주면 모두들 차창에 바짝 다가가 저 서정적 풍광을 역사의 공간으로 바꾸어 보려고 상상의 날개를 편다. 국토의 의미는 언제나 그런 식으로 확대된다. 달리던 찻길이 황강을 뒤로 하고 어느 만큼 지나다 시리봉 험한 고갯길을 힘겹게 넘으면 쌍림 삼거리가 나온다. 이쯤에서 나는 다시 해설을 시작한다.

"여기서 곧장 올라가면 고령이고 왼쪽으로 가면 거창과 해인사로 가는 길이 됩니다. 해인사 쪽으로 가려면 야로면(冶爐面)을 거치게 되는데 이 이색적인 동네 이름은 대장간 '야'자와 용광로 '로'자가 합쳐진 것입니다. 알다시피 가야는 철의 왕국이었습니다. 고령의 대가야가 후기 가야연맹의 맹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야로면의 철광 덕분이었습니다."

쌍림에서 고령까지는 차로 불과 15분 거리. 한 굽이 산모퉁이를 돌아서 고령읍내로 들어서기 직전 눈앞의 높은 산자락에 둥근 무덤들이 연이어 뻗어 있는 지산동 고분군이 홀연히 나타난다. 나의 손가락 방향을 따라 산상의 고분군을 찾아낸 사람들은 한결같이 "아-"하며 가는 영탄의 신음을 낸다.

가야 사람들은 언제나 산등성이를 타고 오르며 무덤을 조성했다. 김해 금관가야의 대성동 고분군, 함안 아라가야의 말이산 고분군, 창녕 비사벌가야의 교동 고분군, 그 중에서도 여기 고령 대가야의 지산동 고분군이 가장 장대한 것이다. 고령의 뒷산인 이 주산(主山)의 산상에는 2백여개의 고분이 들어차 있고 현재 봉분을 복원해 놓은 것만도 70여기가 된다.

지산동 고분군은 길가에 있는 대가야왕릉 전시관에서 오르게 되어 있다. 이 전시관에는 제44호분의 내부구조를 실물대로 재현해 놓고 있다. 44호분은 거대한 순장묘로 주실(主室) 외에 모두 32개의 소형 순장무덤이 딸려 있다. 여기서 수습된 22개 인골을 분석한 결과 순장자는 40대 남자부터 10대 소녀까지 다양했다. 이 순장묘는 피장자의 권세가 얼마나 컸던가를 말해주는 물증으로 곧잘 이야기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가야가 왜 일찍 멸망했는가를 여기서 읽어본다.

무려 32명의 생사람을 죽여 순장한 이 잔인한 무덤은 죽음과 실존의 문제를 높은 종교적 차원에서 풀어갈 정신문화가 없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고대국가에서 종교란 신앙의 한 형태이자 동시에 국가 통치의 이데올로기 역할을 했던 것인데 가야는 이렇게 샤먼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전시관을 둘러보고 이제 솔나무.참나무가 얼크러진 산비탈 돌계단을 밟으며 지산동 고분군으로 오르면 잡목이 모두 제거돼 하늘이 넓게 열린 산자락에 둥그런 고분들이 줄지어 오르는 장관이 펼쳐진다. 일없이 고분의 일련번호를 점호하듯 헤아리며 오르다가 순장묘 44호분에 다다르면 높이 6m, 지름 27m가 넘는 그 규모의 거대함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된다.

여기서 비탈길 한단을 더 오르면 지산동 고분군 중 가장 큰 47호분이 나오고 연이어 48호.49호.50호.51호 4개의 거대한 고분이 어깨선을 이어가며 산상으로 오를 듯한 기세로 뻗어 있다. 처음 아랫자락을 오를 때만 해도 겹쳐진 두개의 봉긋한 고분을 보면서 대지의 젖가슴 같다며 귀여운 감성을 발하던 사람도 48호에서 51호까지 장대하게 펼쳐지는 '왕릉의 능선' 앞에서는 가벼운 감상을 누그러뜨리고 망연히 바라본다.

왕릉의 능선 오른쪽으로는 고령읍내가 한눈에 다가오고 왼쪽으로는 야로면의 산세가 겹겹이 펼쳐지니 그 산.들과 고분이 어우러지는 모습이란 어떤 조경이 이처럼 장대할 것이며 어떤 환경미술이 이렇게 감동적이랴 싶어진다. 왕릉의 능선에 서면 가야는 정녕 위대해 보인다.

그러나 가야는 불행히도 고대국가로 발돋움하는 단계에서 멸망했다. 그래서 가야사를 세권의 책으로 펴낸 김태식 교수는 '미완의 문명 700년 가야사'(푸른역사)라 했다. 게다가 가야는 자기의 역사를 기록한 문헌을 후세에 남기지 않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가야에 관한 지식들은 모두 '삼국사기''삼국유사'에서 삼국에 딸린 조연으로 기록된 것이거나 중국에서 이민족의 풍속지로 쓴 '위지(魏志)''동이전(東夷傳)'에 나오는 것, 그리고 의문투성이인 '일본서기'의 단편적인 기사뿐이다. 그래서 가야의 이야기들은 대부분 타국과의 관계사 속에서만 논의될 뿐 가야 그 자체의 역사와 문화로 말해지는 것이 없다. 가야는 미지의 왕국인 것이다.

그러나 가야는 사자(死者)를 위한 죽음의 유물로 말하고 있다. 왕릉의 능선을 비롯한 가야의 고분과 고분에서 출토된 무수한 부장품들은 만만치 않던 가야의 문명을 내보이고 있다. 고령지역에서만 모두 세개의 금동관이 출토됐고, 수많은 금귀고리.금팔찌.금반지 등이 발굴됐다. 철의 왕국답게 철제 갑옷.마구(馬具).농기구들이 원상의 모습으로 부장되기도 했다.

그런 중 가야의 저력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가야 토기들이다. 가야 토기는 신라 토기와는 완연히 다른 독자적인 미감을 갖고 있다. 목 긴 항아리.굽다리접시. 그릇받침.잔, 그리고 각종 상형토기들은 어떤 면에서 가야가 신라보다 기법적으로 우수하고 조형적으로 세련됐다는 생각도 들게 한다.

가야 토기 중 내가 특히 사랑하는 것은 토기잔이다. 사슴뿔잔.방울잔.오리잔 같은 상형잔은 물론이고 평범한 일상의 잔들이 한결같이 현대적 멋까지 풍기고 있다. 그래서 가야 토기잔들은 머그잔.와인잔.조끼잔.크라운컵 같은 별명도 갖고 있다. 몇 해 전 제주도 오설록에서 열린 태평양박물관의 '한국의 토기잔' 특별전을 보면서 나는 가야 토기의 아름다움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그런 가야였건만 가야는 끝내 문명의 꽃을 피우지 못하고 그 무한한 가능성을 역사 속에 묻어버리고 만 것이다. 삼국은 고대국가로 발전하면서 제각기 다른 고전적 기풍을 낳았다. 고구려는 강인함, 백제는 우아함, 신라는 화려함에 기초했다. 그렇다면 가야가 지향한 미적 세계는 어떤 것이었을까. 아마도 간결하면서도 세련된 전아(典雅)함이 아니었을까. 그런 미련 때문에 왕릉의 능선에선 그립고도 아쉬운 마음이 솟구쳐 일어난다.

들국화와 억새가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가을날이건 고분마다 잔설을 뽀얗게 머리에 이고 있는 겨울날이건 지산동 고분군에 오르면 '미완의 문명' 가야는 언제나 '그리움의 왕국'이 되고 그 사무치는 그리움 때문에 나의 발길이 차마 떨어지지 않는다.

유홍준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문화예술대학원장><hjyou@mju.ac.kr>
사진=조용철 기자 <youngc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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