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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1년9개월…/전육(중앙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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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작년 여름 서울을 찾은 동구의 한 역사학자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한국의 발전모델을 배우려고 찾아온 사람이었다.
그가 가장 궁금해 한 질문은 대충 이러했다. 『2차대전 후 해방된 신생독립국중 40여년만에 이렇게 빨리 발전한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아무런 부존자원도 없이 이처럼 경이적인 발전을 이룩한 것은 세계역사상 전무후무할 것이다. 분명 기적의 이면엔 탁월한 지도자나 영웅이 있으리라 믿고 그들의 기여도를 알고 싶었다. 그러나 서울의 대학에서 만난 사람들중 적지 않은 이가 한국의 전직 대통령들을 「강압통치의 독재자」 아니면 「학살원흉」「파쇼」「무능력자」로 평가하는데 놀랐다.』
한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끼며 대답에 애를 먹었다. 그의 물음이 던진 메시지를 되씹으며 우리가 흔히 생각해온 지도자론을 다시 살펴봤다. 때로는 시류에 휩쓸려,때로는 감정이 앞서 전체 그림을 외면하거나 편리할대로 해석한 점은 없었느냐고….
과연 우리는 국가발전과는 별개로 미워해야할 지도자들밖에 갖지 못했을까. 현재의 지도자는 어떠하며 앞으로 맞이할 지도자는 어떤 인물이어야 하는가. 미처 용기있는 해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판에 최근 박정희 대통령을 재평가하는 몇몇 지식인들의 주장을 신문·잡지에서 접했다. 지난 3년간 질풍노도같이 휘몰아친 「민주화」의 사회분위기 속에서는 감히 꺼내기 어려운 얘기들이다.
이들의 주장중에는 민주화 최우선의 사고에서 보면 반동에 가까운 것들이 있는데 그 논리는 결코 복잡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해방후사와 시대상황을 냉정히 관찰하면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전 대통령은 숱한 비판과 비난을 수긍하더라도 나름대로 시대가 맡긴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측면이 평가되어야 한다는 시각이다.
이를테면 이승만은 반공이데올로기 집착과 일제청산의 실패에도 불구,남한의 체제를 자유민주주의로 키워나간 것은 옳은 방향이자 업적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동구의 몰락과 김일성 체제와 비교해 보면 더욱 그렇다는 얘기다.
박정희 역시 인권탄압·1인 장기집권이란 비난에도 불구,3등 국가를 2등 국가로 격상시킨데 발휘한 리더십이 정당하게 평가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엽전의식」에 젖어있던 국민들에게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불어넣고 그로 인해 내외로 급신장된 경제발전과 국가의 위상은 박정희와 떼놓고 얘기하긴 힘들지 않느냐는 점이다.
광주사태란 비극성,절제되지 않은 사회정의 감각 등으로 정치의 질적 측면에서 문제를 남겨 퇴임후 엄청난 업보의 시련을 겪은 전두환까지도 물가안정·지속적인 경제발전·올림픽 유치·단일실천 등 재임중 취한 정책의 우선순위 판단은 평가될만하지 않느냐는 소리가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이런 주장들이 근래 부쩍 표면화되고 있는 이면엔 6공 3년간에 대한 저울질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으리라 짐작된다. 강경대군 치사사건의 여파에서 명백히 읽을 수 있었듯이 지금 많은 국민들은 노태우시대가 몰고온 「민주화 홍수」의 부작용을 각기 자기의 잣대로 재며 불만 또는 불안스러워 하고 있는 듯하다.
노대통령은 권위주의 청산과 북방외교 개척이란 가치있는 노선을 취해 왔음에도 리더십의 위기를 맞고 있다. 진보세력은 그의 민주화가 공안통치로 백지화되었다고 주장하고 있고 반대로 보수세력은 그의 민주화는 사회기강을 송두리째 해체한 방일이라고 비판한다.
때문에 그가 퇴임후,경제발전을 기로에 빠뜨리는 모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시대의 요구인 민주화를 추진한 신념의 대통령으로 기록될지,아니면 민주화과정의 갈등에 떼밀려 치적이 퇴색한 실패의 지도자로 귀결될지 관심이 아닐 수 없다.
아무튼 우리는 이제 국가발전 우선의 권위주의 대통령과 민주화 최우선을 표방하고 나선 대통령까지 두루 겪고 20세기를 마감하면서 21세기를 준비해야할 시점에 섰다.
또 의외의 변화가 없는한 1년9개월 후면 새 대통령을 뽑아야 할 처지다.
그런 점에서 시점의 중요성과 차기 대통령의 요건에 관해 그 어느 때보다 국민들이 깨어서 고민해야 할 때가 지금이 아닌가 싶다.
우선 우리는 장기집권을 했거나 임기를 다채운 4명의 대통령으로부터 어느 대통령도 동시에 모든 일을 다 성취할 수는 없다는 교훈을 얻었다. 결국 지도자에 대한 평가는 각기 그 시대상황에 맞는 과제의 우선순위를 바르게 정해 국가·국민의 역량과 맞추어 소신있게 실천해 나갔느냐로 판가름 할 수밖에 없다.
당면한 국가적 과제와 세계사의 추이를 관찰할 때 차기 대통령은 경제발전과 복지를 조화시키고 그것을 통일에 연결시킬 수 있는 능력과 책임감이 무엇보다 절실히 요청되리라 본다.
민주화를 둘러싼 「말의 정치」는 노대통령 시대로 끝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는 차기정권이 직면할 가장 시급한 도전이 민주화 진통의 뒤안길에서 주춤했던 국가의 대외경쟁력을 회복하고 이미 한단계 발전한 통일과정을 구체적으로 가시화하는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같은 과업은 책임감과 통찰력,그리고 강한 리더십을 가진 대통령이 아니면 달성하기 어려운 난제들이다.
투쟁경력,개인적 아집과 독선만 가지고는 90년대 각국 지도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통령이 되기엔 역부족인 상황이 올지 모른다.
집권기간 내내 부담을 안고 살 수밖에 없는 유산을 가진 사람,퇴임후를 걱정해야할 인과에 얽힌 사람,그리고 결단을 제때에 못내리는 지도자도 국민들은 가려내야 할 것이다.
새 시대를 책임질만한 자질과 요건을 갖춘 지도자가 우리의 눈앞에 있는지 없는지 아직 명확하지 않다. 1년9개월은 새 지도자를 찾기에 너무 촉박할지 모른다. 그렇지만 우리는 최선을 찾아내거나 아니면 차선을 택하지 않을 수 없는 운명에 놓여 있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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