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라이프] 스타 마술사 이은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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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무대 위의 삐죽머리 형이 손을 움직일 때마다 빛이 피어오르고, 비둘기가 날았다. 처음 본 마술콘서트. 엄마를 졸라 삐죽머리 형이 쓴 마술책을 산 뒤 뚫어져라 들여다봤다. 박재우(11.서울 대도초등학교 5년)군은 그렇게 마술을 만났다.

◇ 소년, 마술사를 만나다

중앙일보 스튜디오. 재우를 그렇게 두근거리게 했던 그 형이 마술처럼 눈앞에 서 있다. "어, 이게 뭐야?" 마술사 이은결(22)씨가 금방이라도 토끼가 튀어나올 것 같은 검은 실크해트를 재우에게 들이민다. 그러나, 뚫어지게 들여다봐도 모자 속에선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어리둥절해하는 재우를 툭 치며 은결씨가 웃는다. "모자 속에서 뭐가 나올까? 생각해봐. 상상은 또 다른 마술이거든."

스물두살. 아직도 '은결군'으로 불리는 이 젊은 마술사는 나이에 걸맞지 않은 깊이가 있다. 하지만 어린 재우는 '상상만 하기'가 좀 지루한 듯 심드렁하다. 은결씨가 젓가락만 한 막대를 꺼냈다.

"자, 여기 빨간 점이 하나씩 찍혀 있지?"

오르락내리락 막대를 뒤집어 가며 몇번이고 빨간 점을 보여준다. "자, 이제 이 막대가 형한테 가면…" 은결씨 등 쪽으로 막대를 가져간다. "어어?" 재우 눈이 휘둥그레졌다. 빨간점이 세 개다! 몇번을 다시 봐도 세 개다. "자, 그럼 재우한테 가면…" 재우 등뒤에서 나온 막대엔 빨간점 한개가 선명하다. "우와~" 다시 은결씨에게 가면 세 개, 재우에게 다시 가면 한개. "점이 너 싫어하나봐." 은결씨가 놀려도 재우는 눈이 동그래져서 마냥 신기할 뿐이다. 내성적인 성격을 고쳐 보라고 아버지가 보낸 마술학원에서 마음을 온통 사로잡혔던 중학교 3학년 때의 은결씨처럼.

"어떻게 하는 거예요?"

마침내 재우가 못 참고 물어봤다. 은결씨가 씩 웃으며 한쪽엔 점 한개, 반대쪽엔 점 세개가 찍힌 막대를 보여줬다. 어어, 아까는 분명히 양쪽 다 ….

"반대쪽을 보여준다고 들어올리면서 손을 재빨리 움직여 아까 보여준 면을 다시 보여주는 거야. 자, 이렇게…"

막대 끝을 잡고 손끝으로 밀 듯이 뒤집는 것이 요령. 하지만 재우는 맘처럼 잘 안 된다. 막대가 손에서 자꾸 빠져나가 속상하다.

"괜찮아, 괜찮아. 사람은 완벽할 수 없어. 완벽하려고 노력하는 거지."

현란하고 빠른 손동작으로 유명한 이은결씨지만 '원래' 손이 빠른 건 아니었다. "세상에 '원래'란 건 없어요. 끝없이 연습해야 빨라지는 거죠."

◇ 인센디오! 불이여, 타올라라

화려한 트럼프 마술을 보여달라는 사진기자의 주문에 은결씨가 정색을 한다.

"어린이들 앞에서는 카드 마술을 잘 안 해요. 도박도 연상되고, 나쁜 영향을 줄지 모르니까요."

대신 티슈 상자를 꺼내든다. 휴지를 잘라내서 달과 별을 만드는 마술, 달팽이 모양으로 휴지를 만 뒤 조그맣게 줄어들게 하는 마술…. 마법의 가루를 뿌리는 척하면서 한손으로 달팽이 머리 부분을 잘라내는 비밀을 가르쳐주면서 은결씨는 조심스럽다. 쉽게 배우는 마술은 '속임수'가 되기 십상이기 때문. 하지만 비밀을 안 뒤에도 여전히 반짝이는 재우의 눈에선 '속았다'는 실망감이 아닌, '나도 이젠 마술을 할 수 있다'는 기쁨이 느껴졌다. 드라마와 영화를 보며 속임수라고 비난하지 않듯이, 마술 역시 꿈을 담아 펼쳐내는 잠깐의 환상일 뿐. 그 환상에 즐거워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은결씨를 프로마술사의 세계로 들여놓았다.

"마술학원에서 만난 형이랑 고2 때 대학로에서 길거리 공연을 했어요. 아, 나도 박수를 받을 수 있구나,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게 이렇게 행복한 거구나…, 그 느낌을 잊을 수가 없었어요."

뾰족뾰족 세우는 특이한 머리를 만드는 시간이 2시간에서 15분으로 당겨졌듯이 은결씨의 마술에도 땀의 무게가 얹혔다. 세계적인 마술대회에서 네차례나 우승했고, 올여름엔 3년마다 열리는 '마술월드컵'에서 종합2위를 차지했다. TV.광고 출연 등으로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도 누리고 있다. 하지만 '이은결'이라는 이름 석자보다는 '마술사'로 기억해주길 바라는 그는 서울 코엑스에서 다음달 20일부터 보름동안 열리는 단독 마술콘서트 준비에 여념이 없다. "무대에서 죽고 싶다"고 말하는 그의 뜨거운 열정처럼 손에 든 지갑에서 화르륵 불꽃이 솟는다. 재우의 입이 떡 벌어졌다. 위험할지 모른다는 데도 "나도 성냥을 잘 켠다"며 고집을 부린다. 결국 형보다 더 큰 불꽃을 피워올리며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자, 이 마술은?

"음…일단 산소가 있어야 하고요, 분자가 나눠지면서 이 화학작용이 강렬하게…"

은결씨가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재우가 키득거리며 웃는다. 두 마술사만의 비밀이 타올랐다.

글=구희령 기자
사진=변선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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