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여당 정치논리에 '권오규 시장경제' 백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3면

9월부터 민간 아파트의 분양원가가 공개된다. 그동안 이에 반대해 오던 정부가 결국 정치권의 줄기찬 요구에 '백기 투항'한 것이다.

정부는 투기과열지구에 한해 7개 항목의 원가만 공개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집값 상승 압력이 높은 서울과 수도권 등은 대부분 투기과열지구에 포함돼 민간 아파트의 분양원가 공개는 사실상 전면 시행이나 다름없다. 또 8년 만에 도입되는 민간에 대한 분양가 상한제와 2008년으로 예정돼 있던 청약 가점제도 9월에 일제히 시행된다.

정부와 열린우리당은 11일 국회에서 김근태 의장과 강봉균 정책위의장, 한명숙 총리, 권오규 경제부총리, 이용섭 건설교통부 장관 등이 참석한 가운데 고위 당정 협의를 열고 이 같은 내용의 부동산시장 안정을 위한 제도 개편 방안에 합의했다.

◆처음엔 시장논리 주장=지난해 12월 27일 열린우리당 부동산특위와의 당정 협의에서 권오규 부총리는 "분양가 상한제를 도입하기로 했기 때문에 분양원가 공개는 지나친 규제"라고 밝혔다. 원가 공개에 대한 반대를 분명히 한 것이다.

이날 회의 뒤 강팔문 전 건교부 주거복지본부장도 "분양가 상한제만으로도 충분하다"며 당의 요구에 반대하는 건교부의 입장을 기자들에게 설명했다. 원가 공개를 논의하기 위해 정부가 만든 분양가 제도개선위원회도 반대 의견을 냈다.

새해 들어서도 강봉균 정책위의장이 정부 입장을 두둔한 가운데 박병원 재경부 차관도 두 차례에 걸쳐 반대 입장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하지만 열린우리당의 부동산특위는 이를 경제논리보다는 정치공세로 몰아갔다. 지난해 말 김근태 의장은 "민간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를 확고하게 추진하겠다"고 공언했고, 이미경 특위 위원장도 "원가 공개 방안을 반드시 관철시킬 것"이라고 강조했다. 부동산값 폭등으로 여당의 지지도가 떨어진다고 판단, 무리를 하더라도 대통령 선거 이전에 즉효를 낼 대책을 내놓겠다고 의욕을 보인 것이다.

◆결국 청와대가 교통정리=지난해 12월 26일 당정 협의가 끝난 뒤 청와대는 분양원가 공개에 대한 입장을 밝히겠다고 했다. 이후 청와대가 공식적인 입장을 내놓진 않았지만 공개하는 쪽으로 정부를 다그친 것으로 알려졌다. 며칠 사이에 정부의 입장이 급선회한 것도 이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에 따라 경제논리를 주장하며 원가 공개를 반대하던 관계 장관들의 입지가 결정적으로 좁아졌다. 결국 권 부총리를 비롯한 관계 장관들이 일제히 평소의 소신을 접고 원가 공개에 합의한 것이다.

이날 회의에서 열린우리당 건교위 간사인 주승용 의원과 정무위 간사인 신학용 의원은 "시장경제 논리에 맞지 않고, 당내에서도 부정적인 의견을 가진 의원이 많다"며 반대 의사를 나타냈지만 찬성론에 묻히고 말았다.

◆뒤늦게 합리화하는 정부=분양원가 공개 반대를 주장하던 권오규 부총리는 이젠 합리화를 위한 논리를 제시하고 나섰다. 그는 이날 "부동산 전문가나 업계에서 공급 위축 우려를 제기해 왔지만 일반 국민의 기대는 달랐다"며 "두 가지 상반된 요구 사이에서 합리적인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원가 공개 범위가 공공택지의 경우 7개에서 61개로 늘어나는 데 반해 민간은 7개 항목밖에 안 되고, 공개도 시.군.구마다 설치될 분양가심사위원회가 담당하는 간접 방식이어서 기업의 부담이 크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업체가 실질적으로 이익을 남기는 택지비와 가산비의 원가가 공개되기 때문에 권 부총리의 전망이 너무 낙관적이라는 게 시장의 반응이다. 또 분양원가 공개는 다른 제도와 달리 부동산 시장이 안정된 다음에도 쉽게 없앨 수 있는 제도가 아니다. 이 때문에 원가공개가 두고두고 정부의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김준현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