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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삶 시로 반추 젊은 시단에 새바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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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도시의 일상적 삶을 소재로 한 시집들이 잇따라 출간되고 있다. 최근 유하씨의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문학과지성사간)를 비롯, 박상우씨의 『물증이 있는 삶은 행복하다』, 양선희씨의『일기를 구기다』, 최영철씨의『가족사진 』등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사이 젊은 시인들의 시집이 잇따라 출간됐다. 이 시집들은 80년대 왜곡된 현실에 대한대응으로서의 사회학적 상상력에서, 또 농경공동체사회에 뿌리를 둔 전통적 서정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젊은 도시세대답게 도시의 일상적 삶을 시적 공간으로 확보하고 있어 후기산업사회로 접어든 90년대 시단의 한 흐름을 이룰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지하철에서 아침신문을 보다 일순 가슴이 덜컥했어/죽은 독재자가 대문짝만 하게 나를 노려보며/잔뜩 무게를 잡고 앉아 있더군 정신차리고 보니까/그 독재자와 닮은 용모 때문에 단단히 한큐 잡은/탤런트가 위장약 선전을 하는 광고란이었어/나도 위장병으로 몇 개월 시달려봐 아는데/쓰린 속을 달래는데는 단연 미란타가 따봉이지…』(『미란타1』중).
첫 시집『무림일기』에서 현실을 무림에 비유해 풍자했던 유하씨는 이번 시집에서는 우리의 일상을 그대로 떠올리며 그 중에서 품자나 반성할 부분을 찾고 있다. 압구정동 뒷골목이며, 일상 우리의 눈과 귀를 사로잡고 있는 광고·TV등을 통해 정치적 욕망과 물질적 욕망, 성적 욕망이 뒤엉킨 산업사회를 풍자하고 있다.
『말하자면 광나는 것은 좋지 않은 법/80년대는 유광의 시대/스스로 앞서 빛나지 않으면/아무도 보아주지 않던 시대/유광은 갔다/번쩍이던 공화국의 초라한 뒷모습/그 너머 기적처럼 무광이 온다』는 최영철씨의 시 『무광』의 일부에서 볼 수 있듯 이들이 노리는 것은「무광의 미학」혹은「소시민적 미학」으로 볼 수 있다. 이데올로기나 시의 양식파괴에 치중했던 80년대의 섬뜩하거나 기발한 시에서 벗어나 이들은 도시의 잡다한 일상성을 시적 공간으로 확보, 거기서 조용히 삶의 의미를 캐묻고 있기 때문이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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