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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순과 정운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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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보통의 사제지간을 훌쩍 뛰어넘는 각별한 사이가 된 데는 이런 사연도 있다. 정운찬이 지금의 부인 최선주씨와 사귈 때다. 최씨 집에서 둘의 결혼을 반대했다. 스승은 술병을 들고 직접 최씨의 아버지를 찾아간다. 그러고는 "건실하고 믿을 만한 청년이니 사위 삼아도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설득해 결국 결심을 얻어낸다. 부부의 연을 맺는 데에도 큰 도움을 준 것이다.

제자는 스승의 일이라면 마다하지 않고 발벗고 나섰다. 스승이 1995년 첫 민선 서울시장으로 출마했을 때 그는 발이 부르트고 목이 쉬어라 뛰었다. 정치판 경험이 일천한 그는 자원봉사로 선거를 도우면 당연히 자기 돈을 쓰는 줄 알았단다. 은행에서 3000만원을 신용대출받아 운동원들한테 밥 사고 술 사고 선거운동하는 데 몽땅 썼다. 그는 "뻔한 교수 월급에서 빌린 돈을 갚는 데 꼬박 4년이 걸렸다"고 말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97년 대선을 앞두고 의견이 갈린다. 당시 야권은 4수에 도전하는 김대중(DJ)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그룹과 제3후보론이 맞섰다. 민주당 총재로 추대된 조순은 높은 여론 지지에 고무돼 대선 출마를 꿈꿨지만 정운찬은 반대했다. "나가시면 안 됩니다"고 만류했다. "왜 안 된다는 거냐"는 스승에게 그는 "떨어지실 수도 있습니다"고 맞섰다. 조순이 각종 여론 조사에서 수위를 달리며 독주 행진을 이어갈 때였지만 정운찬은 바람만으론 관록과 조직의 DJ를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단기필마' 조순의 도전이 무모하게 비쳤다.

그로부터 꼭 10년이 흘렀다. 예전의 스승이 그랬던 것처럼 정운찬은 대선주자 후보의 반열에 오르내리고 있다. 스승이 이미 거쳐갔던 한국은행 총재, 경제부총리, 서울시장 후보 자리를 모두 사양한 끝이다. 열린우리당은 그를 영입 0순위로 꼽고 있다. 굳이 '노무현 신화'가 아니더라도 10년 사이 정치판은 많이 변했다. 관록 있는 기성 정치인이 정치 신인들과 붙어 나가떨어지고 조직과 자금이 없더라도 '바람'만으로 대선 후보도, 국회의원도, 서울시장도 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외부 환경만으로 보면 '단기필마' 정운찬이 도전해 볼 만한 여건은 조성됐다. 조순은 "정직하고 깨끗하고 결단력 있고 큰 그림이 있고 염치를 알며 주변에 사람이 많아 국가 장래를 제대로 만들 수 있다"고 그를 평가했다. "정운찬 같은 사람의 정계 진출은 바람직한 일"이라고도 했다. 정운찬의 고민이 깊어가는 이유다. 그는 1월 들어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한 채 장고 중이다. 15일 영국으로 출국, 머리를 식히고 돌아올 계획이라고 한다.

장고의 끝은 무엇일까. 여당의 영입설에 대해 그는 "불이 꺼져가니까 나를 불쏘시개로 이용하려 한다"며 불쾌해했다. '이용당하지 않겠다'는 자기 암시이거나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결단을 내리겠다'는 메시지로 읽힌다.

물론 정치에서 '타이밍'은 중요하다.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못지않게 중요한 게 있다. 소신과 결단이다. '왜 정치권에 들어가려 하는가'에 대한 명확한 답변이 우선돼야 한다. 정치에 들어가 실현하고자 하는 가치는 무엇이며, 이를 위해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에 대해 자신과 국민에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 대한 대답을 얻었다면 과감하게 결단을 내려야 한다. 결단은 자신을 던져버릴 각오가 있을 때 가능하다. 그렇지 않고 어떤 '자리'를 염두에 두고, 이런저런 기회와 가능성을 저울질하는 것이라면 아예 생각을 접는 게 낫다. 그렇게 해서 후보나 대통령의 자리를 얻는다 한들 모래 위의 누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정민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