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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구서「명예회복」하고 싶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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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21면

오치성 전 내무장관(65)은 강렬한 인상을 주는 과거사가 많다.
5·16주체, 3공 시절 항명파동을 촉발시킨 강성행정, 그리고 5·17세력에 좇기면서 3년7개월간 체포되지 않은 강인함 등등.
두 차례나 전국 최고 득표율로 당선됐던 선거구인 경기 가평·양평(포천·연천은 13대 총선 때 나눠짐)을 열심히 찾아다니는 그의 현재 모습은 당연한 것 같으면서도 의외라는 느낌이다. 87년 JP(김종필 민자최고위원)와 함께 정치를 재개해 현재는 3당 통합으로 민자당 소속이다.
『정치의 핵심에 있었던 시절 주민들과 나눴던 옛정을 다시 교환하며 사는 것이 인간의 도리입니다. 주말에 결혼주례를 서고 서너 시간 걸려 다시 서울에 돌아올 때 불편하지만 신의·의리를 나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합니다.
그의 5월일정표에는 어버이날 잔치·노인 회·단합대회 등으로 꽉 차있었다.「의외」라는 느낌은 그의 신조와 정치에 대한 강한 애착을 들으면 금방 사라진다.
시세가 바닥인「요즘 정치」를 어떻게 보십니까.
『국민들이 정치에 대해 매우 회의적으로 불신하고 정치실종을 혹평하는 것을 볼 때 안타깝습니다.』
그는 정치현장에서 떨어져 있어 구체적으로 말하기 뭐하다며 대신 농촌의 문제점을 얘기했다.『농민들이 60, 70년대 새마을사업이 한창일 때는 열심히 하면 가시적인 것을 얻을 수 있어 의욕이 넘쳤으나 현재 농촌에는 의욕자체가 없어 걱정입니다.
말을 돌려 그의 정치적 좌절이 된 5·17당시(80년)를 물어봤다.
『그쪽(5·16세력) 에서 나를 포섭하려는 시도도 있었지요. 1인당 국민총생산(GNP) 1천 달러 이하일 때는 혁명이 성공하지만 1천 달러를 넘어가면 불가능하다는 점을 들어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5·16 군사혁명에 참여했던 사람으로 군이 나오는 사태가 되풀이돼선 안되고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범한다고 군 후배들에게 강조했지요. 그러니 나를 잡으려한 것 아닙니까.』
-3년7개월간 서슬 퍼런 5공 초기의 수사망을 어떻게 피했습니까.
『그쪽의 고위간부가 사전에 각본이 있음을 들어 피하라』 고 알려주었습니다. 나의 체포사유가 부정축재라는 것을 듣고 죄가 없는데 왜 도망가느냐고 했지만 폭풍이 끝날 때까지 피하기로 했습니다. 마음의 가책이 없으니까 건강하게 있을 수 있었지요.』
그러면서 그는『부정축재혐의에 맞춘다고 딸애의 1만8천원 짜리 목걸이까지 압수해가고 연대 다니던 아들의 미국유학도 신원조회가 들어가니 허가가 안나왔지요.』
-71년 오 내무장관 신임결의안에 공화당의원 일부가 동조해 가결된 이른바 항명파동이 권력내부의 파워게임 시각에서 평가되고있는데요.
『당시를 생각하면 반성할 점도 있곤 하지만 단호히 말하고 싶은 것은 사감으로 일 처리 (경찰·군수인사)를 한 것이 아닙니다. 내무장관으로 국가공무원 기강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지4인 체제(김성곤·백남억·김진만·길재호씨)를 누르기 위한 것이 아니었지요.』
-어쨌든 항명파동으로 오 장관과 4인 체제 양쪽 모두가 정치핵심에서 밀려 유신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는 분석이 있지 않습니까.
『그 직전 대통령 선거에서 박대통령의 생각보다 표 차(김대중 당시 신민 후보와 비교)가 적었고 국회의원선거도 예상보다 성적이 좋지 않았습니다. 박대통령은 이 결과가 내부의 요인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이 체제(4인 체제)로 일을 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유신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이제 5·16 30주년이 다가오는데 5·16이 제대로 평가받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당시는 백척간두, 누란의 위기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나선 겁니다. 그때도 과거를 모르는 후손들이 우리를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5·16이 없었어도 우리나라는 그냥 잘 성장했을 것이라는 주장은 무책임합니다. 필리핀·태국이 그때 우리보다 훨씬 잘 살았지만 지금은 입장이 뒤바뀐 것은 무얼 얘기합니까.
그는『5·16이 과거를 위한 평가가 아닌 미래의 교훈으로 평가되길 바란다』고 했다.『이제 정치를 하더라도 앞 뒤 안 가리고 뛰어들 시기는 지났다』면서도『얻어맞은 게 너무 치사해 애써 가꾼 지역에서 명예회복하고 싶다』며 정치재개 의지를 은연중 토로했다.
3남1여를 둔 4선 전 의원인 그는 막내아들을 빼고 모두 결혼시켰지만 두 아들과 며느리들을 함께 데리고 살고 있다. <글 박보균 사진 김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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