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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故 이강훈 前 광복회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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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2일 1백세를 일기로 별세한 청뢰(靑雷) 이강훈(李康勳) 전 광복회장은 평생을 독립운동과 민족정기 확립를 위해 애쓴 원로 애국지사다. 李전회장의 생애는 독립운동과 민주화 운동으로 옥고를 거듭하며 중국.일본 등 이국을 떠돈 고난의 길이었다.

광복회 관계자는 "생존 독립투사 가운데 맏형으로서 항일민족정신을 가다듬고 독립운동사를 정리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며 애도를 표했다.

1903년 6월 강원도 김화에서 태어난 李전회장은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돼 고초를 겪은 뒤 만주로 망명, 독립운동에 첫발을 디뎠다. 그는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임시정부에 참여했고 다시 북간도로 넘어가 사범학교를 졸업했다. 25년 김좌진 장군 휘하에서 항일전선에 투신한 그는 국내 독립투사들과의 연락 및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다 중국 경찰에 체포돼 수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李전회장은 26년 중국 안투(安圖)현에 신창학교를 설립해 민족교육에 앞장섰고, 무력 투쟁을 목표로 고려혁명의혈단을 조직해 참모로 활동했다. 33년엔 별동대인 흑색공포단(BTP)을 조직해 주중일본공사 아리요시(有吉明)를 폭살하려 했으나 사전에 발각돼 징역 15년형을 언도받아 일본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李전회장은 감형으로 42년에 형기가 끝났으나 민족의식이 농후하다는 이유로 예방구금 판결을 받아 다시 옥고를 치렀다. 그는 광복 후인 45년 10월에야 출옥했다.

이후 일본에 머물며 윤봉길.이봉창 의사의 유해 봉환을 주선하던 李전회장은 60년 귀국했다. 하지만 귀국 후의 삶도 평탄하지 않았다. 그는 혁신정당에서 정치활동을 하다 5.16 군사 쿠데타 이후 민주화 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체포돼 3년 동안 옥고를 치른 뒤 일본으로 건너갔다. 67년 다시 귀국한 李전회장은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찬실장 등을 지내며 스무권이 넘는 독립운동사자료집 등을 발간했다. 88년부터 92년까지 광복회장을 지냈다.

서영훈 한국적십자사 총재는 "고인은 독립운동에 온몸을 바치느라 북에 남겨둔 첫 부인과 아들의 생사조차 몰라 이산가족 상봉 때마다 아쉬워했다"고 말했다. 67년 결혼한 부인 이병환(58)여사와 슬하에 아들 승재(30)씨를 뒀다.

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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