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수녀 「구도의 길」포기 결혼|소설·시 모아 공동작품집 낸 김영웅·박재희씨 부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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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한때 스님과 수녀로 각각 구도의 길을 걷다 환속, 결혼한 부부가 지난 1일 자신들이 쓴 소실·시를 한데 묶은 공동작품집을 내놓아 출판가의 화제가 되고 있다. 『언제나 막차를 타고 오는 사람』(도서출판흙 간)이라는 제목의 이 책에는 이들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결혼할 때까지 남편 김영웅씨(34)가 아내 박재희씨(35)에게 보낸 연서가 소개돼 있어 종교의 두터운 벽을 넘어 부부가 되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겪어온 고뇌·번민·좌절을 엿볼 수 있어 더욱 관심을 끈다.
이들의 「운명적인 만남」은 83년 서울 내자동 육교 근처에서 이루어졌다. 승복을 입은 김씨가 지나가던 한 수녀의 단아한 모습을 보고는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서버렸다. 자신도 모르게 그 수녀에게 다가가 『시간 좀 내달라』고 간청했다.
술 취한 「땡추중」쯤으로 여긴 수녀는 곧바로 근처 파출소로 달려가 김씨를 고발했다.
다행히 훈방으로 곧 풀려 나온 김씨는 조서를 꾸미는 과정에서 수녀의 주소를 눈 여겨 봐두었다.
그때부터 김씨의 회답 없는 편지가 시작됐다.
84년 박씨는 고질병인 심장병이 악화, 더 이상 수녀원의 엄격한 절제생활을 감당할 수 없어 고해성사를 바치고 수녀원을 떠나 고향인 충남 서산으로 내려갔다.
87년 김씨도 『절에 있으되 참중이 되지 못하고 부처님의 밥만 축내고 있다』는 생각에 절을 떠났다.
그러나 둘 다 각자의 종교를 버린 것은 아니었다. 김씨는 「비승비속」으로, 박씨는 「수녀복을 입지 않은 수녀」로 다시 해후했다.
88년 2월 김씨가 스승으로 모시고 있는 소설가 이호철씨와 수녀회 모임 박씨 선배의 적극적인 주선으로 두 사람은 결혼의 꿈을 이루었다.
이씨의 도움으로 서울 동숭동 단칸 월셋방에서 신혼살림을 차리고 남편 김씨는 수세미 행상, 광고전단 돌리는 일을 했고 아내 박씨는 파출부 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열심히 산 덕에 지금은 동숭동에 조그마한 옷가게를 마련했고 보증금 5백만원·월9만원의 사글셋 방에서 살수 있는 호강(?)도 누릴 수 있게 됐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구도의 길을 가지 못하는 죄책감을 보상이라도 하듯 아내 박씨는 재활원 등에서 지체장애자 어린이들을 남몰래 도와왔다.
또 문학에의 열정을 버리지 않고 틈틈이 글을 써온 남편 김씨는 91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에 『바다 뭍바람』으로 당선, 문단에 정식으로 데뷔했고 아내 박씨도 작년 여류문학회주최 주부 백일장·KBS 자작시 경연대회에서 입상한바 있다.
두 사람의 얘기가 세상에 알려지자 영화사 등에서 접촉해 왔지만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김씨는 『세상사람들은 오직 스님과 수녀가 결혼했다는데만 흥미를 느끼고 있는 것 같다』며 『우리 같은 사람들이 더 이상 얘깃거리가 되지 않는 세상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김씨는 이달 말께 자신의 첫 장편소설을 출간할 예정으로 서울근교에서 외부와의 접촉을 끊고 마무리 작업에 한창이다. 『개인 시집을 내고 싶다』는 아내 박씨는 『무엇보다 아들 승환(3)이 건강하게 자라는 것이 대견스럽다』며 행복한 모습으로 활짝 웃었다. <정재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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