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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유」 불심으로 돌아가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5면

불교 집안의 가장 큰 명절인 「부처님 오신날」 (21일)이 2주일여 앞으로 다가왔다.
며칠 있으면 서울 시청 앞 광장에 불탄 봉축탑이 세워지고 전국 곳곳의 사암과 대도시 중 심가에 인류 구원의 큰 뜻을 편 부처님의 광명을 새삼 일깨우는 연등들이 불을 밝힐 것이다. 국가 공휴일로까지 지정돼 있는 4월 초파일「부처님 오신날」은 단순한 불가만의 명절이 아니라 우리 민족 전래로 뿌리깊게 이어져온 민속명절이기도 하다.
그런데 올해의 4월 초파일 맞이에는 현재로선 축제적인 중생들의 신명과 불탄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픈 마음을 솟구치게 하기보다는 자비로운 부처님 얼굴을 찌푸리게 하는 우울한 기상예보가 들려오고 있다.
우울한 기상 예보란 불탄의 큰 뜻을 기리는데 주인공 역할을 해야할 불교 조계종이 「종정」이라는 집안 어른을 모시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 l월로 임기가 끝난 이성철 종정의 후임을 3개월이 지나도록 추대하지 못한 채 종단내의 이런 저런 이해 관계와 문중 파벌간의 대립으로 후임 종정 추대를 둘러싼 잡음들만 들린다.
조계종이 한국 불교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법맥 계승의 정통성과 현실적인 교세 면에서 볼 때 「조계종 곧 한국 불교」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따라서 조계 종단의 종정은 비록 세속적인 의미의 실권을 갖지는 않지만 지엄한 집안 어른으로서, 한국 불교의 법통을 대표하는 부처님 화신으로서 구도의 고행과 법력을 보여주는 도인으로서의 「상징성」은 대단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중요한 자리를 세속 중생만도 못한 승단 일각의 집착으로 공동화시킨 채 불탄일을 맞게된 오늘의 불교 현실을 어떻게 봐야할지는 자명하다. 불교계 주변의 얘기로는 「부처님 오신날」까지 조계종 종정이 추대될 가망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동안 몇차례 추대 위원회를 소집해봤고 세속 정치를 모방한 막후 절충이니 타협이니를 시도했지만 모두 허사였고 3일에도 추대 회의를 열어보려 했지만 회의장 점거 소동 가지 빚은 채 유회되고 말았다고 한다.
참으로 딱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일체 「무소유」를 선언하고 세속 혈연과 세상만사를 훌훌 털어 버리고 걸망하나 짊어지고 나서 출세간법을 따라 치열한 구도 행각의 길을 걷는 스님들이 집안 어른 하나를 모시는데 그처럼 구구한 모습을 세속 중생들에게까지 보여주어서야 되겠는가.
「부처님 오신 날」을 제사에 비유한다면 조계종 종정은 제주이고, 종정의 법어는 축문이다. 제주가 없고 축문도 없는 제사도 있을 수 있을지….
우리 세속 중생들은 4월 초파일이면 조계종 총경의 불탄을 기리는 청량 법음을 들으며 깊은 산골짜기를 흐르는 맑은 개울물에 덕지덕지 묻은 몸의 때를 씻어 버리는 듯한 상쾌한 기분을 느껴왔다.
때로는 그 법음이 정신적 공황 상태를 빚고 있는 우리 사회에 신선한 충격과 깨달음을 주기도 했다.
남의 제사에 곶감 놓아라 밤 놓아라 하는 시비가 결코 아니다.
불교에 대한, 조계 종단에 대한 기대와 애정이 있고 이 어둠에 묻힌 사회를 제도해줄 부처님의 밝은 등불이 어느 때 보다도 소망스러운 시절이기 때문이다.
조계종은 이같은 중생의 요망과 한국 종교 사회에서 차지하고 있는 막중한 위상을 자각, 하루속히 종정을 추대하고 「부처님 오신 날」이 제주 없는 제사가 되지 않도록 해주길 바란다.
조계 종단사에 이처럼 종정이 공석이었던 예가 없었다. 종정 부재는 엄밀한 의미론 조계종 법통의 단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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