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있는아침] '오미자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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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오미자 한 줌에 보해소주 30도를 빈 델몬트 병에 붓고

익기를 기다린다.

아, 차츰차츰 더 바알간 색,

예쁘다.

막소주 분자(分子)가

설악산 오미자 기개에 눌려

하나씩 분자 구조 바꾸는 광경.

매일 살짝 보며 더 익기를 기다린다.

내가 술 분자 하나가 되어

그냥 남을까 말까 주저하다가

부서지기로 마음먹는다.

가볍게 떫고 맑은 맛!

욕을 해야 할 친구 만나려다

전화 걸기 전에

내가 갑자기 환해진다.


오미자, 어여쁜 누이의 복사빛 볼이 떠오르는 이름. 명자나무 하면 떠오르는 바알간 꽃빛 같은. 보해소주 30도 분자들을 물들인 오미자술, 그 한 잔의 사랑, 한 잔의 용서, 한 잔의 봄, 그리고 한 잔의 비애, 한 잔의 고통, 한 잔의 분노… 인생의 몰약이자 마약, 명약이자 독약! 저리 불타오르는 물, 폭발하는 물! '입과 항문 사이를 온통 황홀케 하는 술, 계속 익을까?'

<정끝별.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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