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세계 생명은 독창성 따라 두기 하면 그냥 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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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중국에 밀리고 있는 한국바둑은 다시 부활할 수 있을까. 스포츠가 된 프로 바둑은 자유경쟁을 받아들일 준비가 됐나. 청소년 층이 떠나가고 있는 바둑은 장기적으로 생존이 가능할까. 바둑의 세계화는? 신년을 맞아 바둑계의 난제들을 들고 조훈현(사진) 9단을 찾았다.

조 9단은 만 50세였던 4년 전에 누구도 깨기 힘든 157번째 우승을 거둔 뒤 "내 시대는 지나갔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주인공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불굴의'바둑 황제'가 승부사로서의 한계를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대신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한국기원 상임이사와 TV해설자로 활동 영역을 넓히며 승부 외적인 분야에서 식견과 영향력을 증대시켜 왔다. 3일 만난 조 9단은 기대했던 대로 명백한 자기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

- 2006년 한국바둑이 중국에 대패했다. 그 이유는 무엇으로 보는가. 또 올해의 한.중 대결은 어떤 양상으로 전개될까.

"중국이 우승을 많이 했지만 이창호 같은 최강자가 나온 것은 아니기에 중국 우세를 인정할 수는 없다. 뤄시허.구리.왕시 등이 돌아가며 우승을 했지만 다 기존에 알려진 인물들 아닌가. 승부세계에는 운세랄까 그 비슷한 것이 존재하는데 그동안 한국의 상승세가 두드러졌다면 지난해는 오랜만에 중국에 운이 좀 따라준 것뿐이다. 정신적인 차이는 있었다. 중국은 '한국 타도'라는 목표가 분명했고 그만큼 필사적이었다. 한국도 과거 '일본 따라잡기'에 매달릴 때는 필사적이었는데 너무 많이 우승하면서 팬들의 관심도 줄고 무엇보다 꼭 이기겠다는 긴박감도 사라졌다. 하지만 실력에선 아직 한국이 뒤지지 않는다."

- 일본이 하향세에서 돌아설 희망은 없는 것인가.

"얼마 전 스승인 후지사와(藤擇秀行) 선생의 부탁으로 일본 젊은 기사들의 합숙 훈련에 가 복기를 해줬는데 젊은 기사들이 한마디 질문도 없이 듣고만 있었다. 일본은 어렵겠구나 싶었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복기가 격렬했고 선생이 이렇게 두라고 명령을 해도 수긍이 가지 않으면 매를 맞으면서도 따라 두지 않았다. 승부세계는 독창성이 생명이고 따라 두면 그냥 아웃이다."

- 한국은 지금 속기 전성시대다. 이런 흐름은 한국 바둑의 질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지적이 있다.

"구경하는 팬들이 빨리 두기를 바라니까 TV에서의 속기는 어쩔 수 없는 대세다. 그러나 속기는 경솔함을 키우고 배짱 승부에 젖게 만드는 나쁜 부작용이 있다. 바둑이란 '아!' 하는 순간 끝난다. 자라나는 신예들이 경계해야 할 대목이다."

- 게임이라는 강적(?)이 나타나면서 청소년 층이 바둑과 멀어지는 추세다. 장기적으로 바둑은 살아남을 수 있다고 보는가. 한국기원은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바둑은 수천 년이나 살아남았다. 때마침 인터넷 바둑도 번창하고 세계화도 진전되고 있어 어떤 계기만 주어진다면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청소년 바둑 인구의 감소는 역시 심각한 문제다. 한국 바둑이 이를 외면하고 그냥 간다면 시간이 5년일지 10년일지는 몰라도 '제2의 일본'이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 화제를 돌려 올해의 세계바둑을 전망해 보자.

"이창호의 위세가 한풀 꺾이면서 절대 강자가 없는 시대가 됐다. 조금 과장한다면 1등에서 100등까지는 누가 이길지 아무도 모른다. 누가 됐든 해마다 우승은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다."

- 조 9단의 157회 우승은 영영 깨지기 힘든 기록이다. 승부사로서 아직 이루고 싶은 것이 남아 있다면.

"내 스승인 후지사와 9단은 66세와 67세 때(92년) 연속 우승했는데 이게 최고령 우승 기록이다. 예전보다 강자들이 훨씬 많아졌지만 이 기록에 도전해보고 싶은 열정이 아직 있다."

- 지난해 바둑이 대한체육연맹에 준가맹하며 스포츠의 일원이 됐다. 프로 스포츠 세계는 자유경쟁과 시장경제가 다른 어느 곳보다 두드러진 곳인데 프로기사들은 그걸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나.

"아직은 준비도 되어있지 않다. 바둑계는 한번 프로기사의 자격증을 따면 영구히 '선수'의 자격을 유지할 수 있었다. 스포츠가 됐다고 이런 전통이 하루아침에 변하겠는가. 그러나 스포츠를 원했으니 책임도 따라야 맞다. 조화가 필요한데 이해관계가 달라 접근하기 대단히 어려운 문제다."

- 청소년 바둑인구와 맞물려 프로기사 등용문 확대 요구도 거세지고 있다.

"그 문제는 지금 사회적으로 한참 시끄러운 미국과의 FTA와 닮은 구석이 있다. 바둑의 경쟁력과 인기, 즉 상품성을 높이려면 문을 넓혀야 하겠지만 많은 프로기사들은 여전히 문을 넓히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줄여야 된다고 생각하는 기사도 있다. 뜨거운 감자다. 외부 전문가들의 연구 결과가 먼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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