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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쉼] 어! 코엘료 '연금술사' 작가를 만나게 될 줄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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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돈 언덕 정상에 있는 철로 만든 순례자상.

# 한국 여성 둘과 길동무 하다

중세와 현대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팜플로냐를 한나절 둘러보다가 느지막하게 길을 떠났다. 피레네 이후에는 5~10㎞ 간격으로 마을이 나타났고, 마을마다 크고 작은 알베르게가 있기에 굳이 무리할 이유가 없었다. 순례자 대부분이 묵어가는 팜플로냐에서 5㎞밖에 안 떨어진, 그래서 손님이 드문 시주르 메노르(Cizur Menor)의 한적한 알베르게에서였다.

"혹시 한국 분?" "맞는데요. 당신도 한국 사람?"

마당에서 빨래를 널던 젊은 여자가 물었다. 그녀는 자기 짐작이 맞은 걸 확인하자 큰소리로 누군가를 불렀다. 그녀보다 더 어려보이는 여자다. 지난해 중국 여행길에서 만난 한국 여자 K와 M은 1년간의 세계 여행이라는 야심찬 목표를 세웠고, 첫 여정으로 산티아고 길을 택했단다.

다음날 아침 우리 셋은 십년지기처럼 다정하게 길을 나섰다. 페르돈 언덕은 품 넓고 경사가 완만한 피레네와는 달리 좁고 가팔랐다. 울퉁불퉁 너덜길도 자주 나타났다. 피레네에선 바람처럼 경쾌하게 내 곁을 지나쳤던 자전거족들이 이곳 페르돈에선 애물단지를 끌고 가느라 쩔쩔맸다. 인간만사 다 새옹지마(塞翁之馬)라니까, 속으로 웃음을 깨물었다.

언덕 위의 풍력기가 그림처럼 서 있다. 바람이 없는 탓에 돌기를 멈춘 채. 무더위에 녹은 아이스크림처럼 푹 퍼져 언덕 정상에 올랐더니, 일군의 말 탄 순례자들이 반긴다. 당장이라도 저 산등성이 너머로 내달릴 듯 역동적인 프로필이다. "아, 페르돈 정상에 순례자 형상의 철 조각이 있다고 했지." 오르막과 씨름하느라 잠시 잊고 있었다.

내려다보니 아득한 첩첩산중, 올려다보니 시리도록 푸른 하늘. 그 하늘 너머로 비행기가 하얀 꼬리만 남긴 채 사라져간다. 두고온 인연이 문득, 마음에 사무친다.

#'코리안 팬케이크' 히트 치다

사람이 그립다 보니 입맛이 일깨워진 건가. 따뜻한 국물이나 부침개가 먹고 싶었다. 사진을 찍느라 정신없는 두 여자에게 제안했다. "오바노스의 알베르게에 도착하면 부침개나 해먹자." 바게트 샌드위치나 값싸고 풍성한 과일로 때우던 그들은 귀찮은 눈치였다. 짐짓 모른 척하고 밀어붙였다. 가게에는 밀가루는 물론이고 호박과 양파도 있었다.

지치고 가난한 순례자들은 거개가 딱딱한 빵이나 간편한 통조림으로 끼니를 때우고 주머니 사정이 넉넉한 축만 근처 레스토랑으로 진출했다. 알베르게 부엌에서 음식 만들기에 도전한 팀 중 맨 먼저 작품을 완성한 건 우리 팀이었다. 흔히 번거롭게만 여기는 부침개는 맛과 속도에서 놀라운 국제경쟁력을 발휘했다. 콩기름 대신 올리브유를 둘렀는데도 아쉬운 대로 비슷한 맛이 난다.

페르돈 언덕 오르막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던 네덜란드 여자가 냄비 속의 달걀이 삶아지기만 학수고대하고 있기에 우선 요기라도 하라고 부침개를 권했다. 망설이다가 접시를 받아든 그녀는 한입 떼어먹더니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러자 아이슬란드에서 온 우슬라가 "나도 좀 맛볼 수 있을까요?" 하며 슬쩍 끼어든다.

되고 말고. 부침개야말로 우리 조상이 가난한 살림에서도 이웃에 돌릴 요량으로 넉넉히 만들던 음식 아닌가! 그러자 식당에서 차디찬 비상식을 먹으며 우리를 지켜보던 이들이 너도나도 '코리안 팬케이크'에 관심을 보이고 나섰다. 세 여자가 열심히 부친 부침개는 순식간에 동이 났고, 이 일로 우리 셋은 '카미노의 천사들'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느릿느릿, 즐기면서 걷기로 마음먹은 중년의 여자. 정해진 기한에 되도록 많은 곳을 둘러보려고 숙제하듯 걷는 아가씨들의 속도를 따라잡기 버거웠다. 그녀들도 전에 만났던 멕시코 청년 펠리페처럼 떠나보냈다.

시라쿠이에서 파올로 코엘료와 함께.

#얼떨결에 작가 명함 내밀다

우연한 만남은 꼬리를 물었다. 9월 17일 정오를 갓 넘어설 무렵 저 멀리 언덕 위에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조는 듯한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시라쿠이(Ciraqui)란다. 진짜로 '얼룩배기 황소가 게으른 울음을 우는' 들판을 지나 동네로 들어서니 어귀에 커다란 방송국 차량이 서 있다. 심심산골에 웬 중계차람? 가까이 가 보니 검정 티셔츠에 검정 바지 차림의 남자와 베이지색 정장을 입은 여자가 카메라 앞에서 이야기를 나눈다.

저 남자 낯이 참 익은데 대체 누구더라? 일단 카메라 셔터를 누르려는데 남자가 자기 쪽으로 오라고 손짓했다. 허락 없이 사진을 찍었다고 혼내려는 걸까, 순간 당혹스러웠다. 그쪽으로 걸어가는 사이에 번뜩 뇌리를 스쳐가는 이름이 있었다.

파올로 코엘료!! 산티아고 순례 경험을 첫 작품 '순례자'에서 풀어낸 뒤 아예 작가로 방향을 틀어 '11분' '연금술사' 같은 화제작을 잇따라 쏟아낸, 한국에도 두터운 독자층을 가진 코엘료였다.

뜻밖에도 그는 사진을 함께 찍자고 권했다. 그제야 마음을 놓고 "나는 한국인인데 당신 책을 인상깊게 읽었다"고 하니 몹시 반가워한다. 무슨 일을 하느냐고 되묻기에, 직장을 그만두고 기사도 안 쓴 지 오래인지라 엉겁결에 "작가"라고 대답하고 말았다. 코엘료는 더욱 반색하면서 언젠가 당신 책도 읽고 싶다고 덕담을 건넸다. 다행히 촬영이 재개되는 바람에 그는 돌아섰고, 난 가슴을 쓸어내렸다. 책을 한 권 쓰긴 했으니 새빨간 거짓말은 아니지, 자위하면서.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바에서 샌드위치를 시켜먹으면서 주인에게 귀동냥한 바로는 코엘료가 워낙 이곳을 좋아해 가끔 찾아오는데 이번엔 방송사 다큐멘터리 촬영차 왔단다. 주인은 코엘료 덕분에 마을이 활기가 넘친다고 싱글벙글이다.

이라체 포도주 공장의 수도. 왼쪽에선 붉은 포도주가 나온다.

#길가 포도를 취하다 ^·^

다시 솔로가 됐지만 예전처럼 외롭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래 걷기에 익숙해지고, 포도밭과 낮은 구릉과 뭉게구름을 하릴없이 지켜보는 데 맛을 들였다. 키 작은 풀꽃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포도밭에서 달고 싱싱한 포도를 취하는 건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풍부한 일조량 덕분에 포도는 가지가 휘도록 열렸고, 일부는 나무에 매달린 채 건포도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포도 서리의 유혹으로부터 누군들 자유로울 수 있을까. 노르망디에서 온 순례자와 이야기하다가 적당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훔쳤다(stolen)"고 했더니 "나는 '취했다(take)'고 한다"면서 눈을 찡끗했다. 아, 이렇게 적절한 표현도 있는 것을.

포도의 고향은 또 다른 선물을 예비하고 있었다. 9월 19일 아침. 에스테야의 알베르게를 나선 지 두어 시간 만에 왼쪽 수도꼭지에선 붉은 포도주, 오른쪽 수도꼭지에선 물이 나온다는 그 유명한 이라체 수도원에 이르렀다. 수도원 뒷문 수도꼭지 주위에 모인 순례자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로또라도 당첨된 양 즐거워한다. 작은 일에 감사하라는 금언을 순례자만큼 잘 실천하는 이들이 또 있을까.

이라체 수도원에는 가톨릭이 융성하고 교황청이 권력의 정점이었던 시절 엄청난 숫자의 수도사가 모여들었고, 그 명성은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다고 한다. 시간은 이처럼 당대의 모든 찬란했던 것을 부식시키고, 당대의 절대권력을 허망하게 만든다. 이라체에서 비정한 세월의 힘을 이겨낸 건 '신이 내린 보석' 포도뿐이다.

서명숙 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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