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중동의 대장금', 에드워드 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카날 아클루 라디단(음식이 맛있군)"

두바이의 특급호텔 페어몬트 호텔의 수석 주방장인 에드워드 권은 세계 최고의 부호 중 하나인 사우디 알 왈리드 빈 탈랄 왕자의 이 말 한마디에 가슴을 쓸어내린다.

평상시 수석 주방장은 음식을 만드는 것을 지휘 감독할 뿐, 직접 요리를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아랍권의 왕족이 뜨면 수석 주방장만 요리를 할 수 있다.

특히 알 왈리드 왕자는 두아비 페어몬트 호텔의 대주주다. 그는 아랍의 왕족들과의 식사 모임을 페어몬트 호텔에서 자주 갖는다. 두바이의 왕족인 막툼 일가도 페어몬트 호텔의 단골이다.

왕족이 뜨면 어김없이 에드워드 권이 재료 선택부터 요리, 서빙까지 직접 챙긴다. 중동 왕족의 입맛을 책임지니 '중동의 대장금'인 셈이다. 그는 시간만 나면 식재료를 찾아서 중동의 재래시장을 전전한다. 외국인이기 때문에 따라잡을 수 없는 맛의 차이 0.01%를 극복하기 위해서다. 그는 "99.99%는 흉내 내지만 0.01%는 아직도 모르겠다"고 고백한다.

11개국 191명 다국적 요리사 군단의 사령관

세계의 인재와 돈이 몰리는 두바이에서 특급호텔 수석 주방장을 하고 있는 에드워드 권은 37세의 한국인 권영민씨다. 대학까지 한국에서 나온 토종이다. 2003년 미국 요리사 협회가 뽑은 '젊은 요리사 톱 10', 2005년 중국 톈진 쉐라톤 그랜드 호텔 총주방장을 역임한 뒤 2006년부터 페어몬트 호텔에서 수석 주방장을 맡고 있다. 그는 11개국 191명의 다국적 요리사 군단을 호령하며 '두바이 드림'을 일구고 있다.

세계 정상급 요리사로 우뚝 섰지만 한국에서 그의 인생은 좌절의 연속이었다. 권씨는 대학입시에 실패하고 재수할 때 요리사로 진로를 수정했다. 그는 "고등학교 때 신부가 꿈이었지만 집안의 반대로 좌절됐다"며 "얼떨결에 요리사의 길에 들어섰다"고 고백했다.

집안이 유복했지만 고등학교 졸업 후 용돈을 직접 벌어 썼다. 아르바이트로 주방 일을 잠깐 했는데, 주방장이 "너 요리에 소질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 때는 무심하게 흘려들었다. 재수를 했음에도 수능 점수가 신통치 않자 군복무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대학에 진학해야 했다. 그 때 그 주방장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요리학과를 선택했다.

당시만 해도 국내에 요리학과가 있는 학교는 두 군데 뿐이었고, 모두 2년제 전문대였다. 요리학과는 학교를 마치고 군대에 가면 취직하는데 어려움이 많다. 일찍 군대를 마치고 복학해 졸업을 앞두고 나가는 일류호텔 실습 기간에 주방장의 눈에 띄어야 취직할 수 있다. 그는 대학에 입학한 지 3개월 만에 휴학하고 군에 입대했다. 군복무를 피하기 위해 진학했으나 오히려 진학과 함께 군대에 가게 된 셈이다. 취사병이 아닌 행정병으로 군복무를 마쳤다.

군대에서 세상을 배웠다

"3년 기간이 허송세월이라고 할 수 있지만 다 자기하기 나름인 것 같습니다. 군대생활에서 인내심과 절제를 배웠습니다. 요리사 사회는 군대조직과 비슷합니다. 일반 요리사들은 주방장에게 절대 복종해야 합니다. 200명분의 식사를 준비하는 과정은 전쟁과 다를 게 없습니다. 주방장의 일사불란한 지휘가 없으면 불가능하지요. 'Yes Sir'라는 복명이 남아있는 조직이 군대와 주방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권씨는 직장운이 좋았다. 졸업할 때 동기 중 유일하게 서울 특급호텔에 취직했다. 리츠칼튼이었다. 2학년 1학기 때 실습을 나갔다 그냥 눌러 앉았다. 실습이 끝날 때 쯤, 돈을 안받고 그냥 일하겠다고 했고, 두 달 동안 교통비 3만원만 받고 일을 계속했다. 주방장이 좋게 보아 리츠칼튼에 취직할 수 있었다.

남부러울 것 없었던 그는 2000년 도미를 결심했다. 양식을 제대로 배우려면 본바닥에 가야한다는 의무감도 있었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이었다.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이후 직장 풍속도가 많이 변했지만 요리사 사회는 아직도 평생직장의 개념이 강하다. 대부분 한 호텔에서 20 ̄30년을 일한다. 한국 리츠칼튼에 남아 있어 봤자 조리과장 정도밖에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영어에 목숨 걸었다

그는 더 큰 기회를 잡기 위해 미국행을 결심했다. 당시 한국 리츠칼튼 총주방장이 장 폴씨였다. 그는 지금 7성급 호텔로 이름 높은 부르즈 알아랍의 총주방장이다. 그는 장 폴씨의 추천과 영어 실력으로 미국행 티켓을 잡을 수 있었다.

미국에 갈 결심을 굳힌 뒤 영어공부에 모든 것을 걸었다. 새벽에 영어 학원에 가서 두 시간씩 공부한 뒤 출근했고, 그날 배운 것은 그날 반드시 써먹었다. 한국 리츠칼튼의 주방에는 외국인이 많았기 때문에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영어회화 연습이 가능했다. 그는 시간만 나면 외국인 요리사들과 어울리며 영어를 갈고 닦았다. "양놈들에게 아부한다"는 주위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결국 영어 인터뷰에 합격했고, 장 폴씨의 추천서와 옷가지 몇 개만 챙겨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는 "미국에 가서 영어 배우겠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한국에서 영어공부를 안한 사람이 어떻게 외국에서 일하면서 영어를 배운단 말입니까. 영어를 체계적으로 준비하지 않으면 바보 취급 받습니다"고 단언했다.

그는 신흥 휴양지로 떠오른 캘리포니아 하프문 베이 절벽에 문을 연 리츠칼튼 호텔에서 본격적인 요리수업을 시작했다.

"정해진 근무시간은 8시간이었지만 하루 16시간씩 일했습니다. 책에서만 보던 싱싱한 재료들을 가지고 요리하는 기쁨으로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저는 미국 애들과 다릅니다. 그들에게 음식은 문화이지만 저는 학습입니다. 식재료의 한계를 넘기 힘듭니다. 치즈만 해도 150개나 됩니다. 시간만 나면 슈퍼마켓에 가서 식재료들을 먹어보았습니다. 당시 벌었던 돈의 70%는 먹는데 썼을 겁니다."

"너 같은 독종은 처음봤다"

그런 권씨의 모습은 이 호텔 총주방장인 자비에 살로몬씨 눈에 띄었다. 5대째 요리를 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미국 요리계에서 '빅 5'에 해당하는 실력자였다.

살로몬씨는 "에드워드 너 같은 독종은 처음 본다. 너를 통해서 아시아인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는 말과 함께 권씨를 자신의 사단에 편입시켰다. 미국으로 건너갈 당시 세컨 쿡(Second Cook, 군대로 치면 이등병)이었던 권씨는 살로몬씨의 지도로 3개월 만에 퍼스크 쿡(First Cook, 일등병)으로 진급했고, 이듬해 수 셰프(Sous Chef, 조리과장)로 진급했다. 10년 이상 걸리는 일을 단 2년 만에 해낸 것이다.

살로몬씨의 배려로 권씨는 뉴욕에 새로운 식당이 오픈하면 비행기를 타고 뉴욕으로 날아가 직접 음식을 맛보았다. 특히 살로몬씨의 추천으로 미국 최고의 레스토랑인 '프렌치 라운드리' 주방에 파견돼 일을 배우기도 했다.

피나는 요리수업 덕분에 그는 2003년 미국 요리사 협회가 선정하는 '젊은 요리사 톱 10'에 뽑혔다. 1년에 6번씩 손님으로 위장한 평가단이 비밀리에 요리의 맛과 질을 평가, 선정하는 젊은 요리사 톱 10은 미국의 젊은 요리사들에게 가장 큰 영예다.

"This food is better than sex"

그는 캘리포니아 하프문 베이의 리츠칼튼 호텔에서 근무할 때 유명 정치가와 스타를 고객으로 모셨다. 골프황제 타이거 우즈, 테니스 요정 샤라포바, 아버지 부시 대통령, 슈워제네거 캘리포니아 주지사. 그리고 할리우드 스타들. 그들은 칭찬에 인색치 않았다. 이름을 대면 모두 알만한 할리우드 여배우로부터 받은 "This food is better than sex"(음식이 섹스보다 낫다)라는 칭찬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지금의 위치에 오른 비결을 밝혀달라는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이 "남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그는 "한국 요리사들은 남의 음식을 먹지 않습니다. 그러나 남의 음식도 맛있는 것이 있습니다. 남을 인정해야만 발전이 있습니다"고 말했다.

그는 해외 진출을 준비하는 후배들에게 두 가지를 부탁한다고 했다. 영어공부와 외국에 대한 허상을 버리라는 것이다.

영어 좀 한다고 했는데도 미국에 갔을 때 8개월간 말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슬랭(속어) 때문이었다. 처음 주방에 배치됐는데, 주방장이 사과를 가져오라고 했다. 사과의 종류만 8개나 된다. 주방장은 파란 사과를 원했으나 붉은 사과를 가져갔다. 주방장은 "Idiot(바보)"라며 사과를 던져버렸다. 굴욕이었다. 이후 그는 슬랭을 통째로 외웠다.

"가만히 있으면 안됩니다. 두려워해서도 안되고요. 영어를 못해서 무시당하는 경우가 많지만 아시아계면 대부분 이해해 줍니다. 열심히 하면 오히려 도와줍니다. 그리고 집에서는 만화를 열심히 봤습니다."

그는 또 외국에 대한 환상을 갖지 말라고 당부했다. 겉으로는 자유롭지만 한국보다 생존경쟁이 더 치열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이 아니라 능력 위주로 사람을 평가하기 때문에 직장생활 하기가 더 힘들다고 했다.

그의 목표는 한국사회에서 요리사의 위상을 바꾸는 것이다. 한국 사회는 아직도 '남자가 무슨 부엌이냐'는 관념이 강하다. 유교적인 그의 아버지는 지금도 권씨의 직업을 탐탁치 않게 생각한다고 한다. 그런 아버지도 요리사를 인정하는 시대를 여는 것이 그의 꿈이다.

[머니투데이]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