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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7가] 야구를 바라보는 세 가지의 눈

중앙일보

입력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아내와 함께 쓴 '부의 미래(Revolutionary Wealth)'에서 '프로슈머(Prosumer)' 경제의 도래를 예고합니다. 프로슈머란 생산자(Producer)와 소비자(consumer)의 합성어로 판매나 교환을 위해서라기보다 자신의 사용이나 만족을 위해 스스로 제품 서비스를 생산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가족을 위해 파이를 굽는 것에서부터 넓게는 비영리 조직과 지역 사회를 위한 봉사활동 등이 모두 프로슈머의 행위(Prosuming)에 포함됩니다.

토플러는 측정되지도 않고 대가도 없이 대대적으로 벌어지는 이 숨은 비화폐 경제 프로슈머의 경제가 다가오는 미래 사회에서 화폐 경제를 누르고 중추적 몫을 해낼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실제로 현 지구촌 화폐 경제 내에서 도는 50조 달러는 프로슈머 경제 없이는 단 10분도 존재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스스로 집수리를 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자재를 공급하는 홈디포의 성장은 바로 프로슈머 경제의 장밋빛 미래를 보여줍니다.

'휴먼 테크' '휴먼 터치' 하면서 소비자 중심 경제론이 화두로 떠오른 게 엊그제였는데 토플러같은 미래학자들은 벌써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야구 이야기로 돌아옵니다. 야구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한 것은 언제일까요? 아마도 80년대 중반 세이버매트리션들이 본격적으로 활동하면서부터 일 겁니다.

이들은 보수적 야구론자들에 대항해 그들의 기록 데이터를 바라보는 시각을 전면 부정합니다. 종전 선수 출신 감독이나 스카우트들이 해온 평가의 잣대를 통째로 뒤바꿔놓은 것입니다.

가장 급진적인 것은 투수의 책임으로 여겨져온 볼넷을 타자의 입장에서도 평가하는 대목입니다. 좋은 투수냐 나쁜 투수냐를 가르는 줄이었던 볼넷이 좋은 타자냐 나쁜 타자냐를 구분짓는 삼팔선이 됐습니다. 타자의 시금석이었던 타율과 타점은 '출루율+장타율(OPS)'로 대체됩니다. 짐 트레이시 감독같은 교과서파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좌타자가 나오면 반드시 좌투수로 대걸이를 해야하는' 기계주의 용병술에도 침을 뱉습니다.

새로운 야구 지식을 추구하는 이들의 구단내 전진배치(단장과 운영부 등 프런트의 핵심 보직 진출)는 많은 보수적인 감독들 스카우트들과 갈등을 일으키면서 거리로 내몰기도 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세이버매트리션들이 목청을 높이기 시작한 시기는 '수용 미학' '해석학' 등 전달자가 아닌 수용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학문의 패러다임이 정착한 시기와 일치합니다. 새로운 학문의 접근법이 야구에서도 화려하게 꽃을 피운 셈입니다.

그런데 메이저리그의 보수주의자들과 세이버매트리션들은 치명적인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바로 데이터의 미망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기록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눈높이의 차이만 있을 뿐 출발은 똑같이 각종 수치들이 빼곡히 적인 종이 쪼가리에 불과합니다. 정작 가장 중요한 사람은 실종됐습니다.

1995년 김인식 감독이 OB(현 두산)에 부임해 한국시리즈 우승을 일궈냈을 때 그의 야구를 '믿음의 야구'라고 정의했던 기억이 납니다.

믿음의 야구는 무조건 선수에게 맡기는 야구를 말한 게 아니었습니다. 상대 투수와 우리 타자의 컨디션 등을 포함한 총체적 역량을 감독이 비교하고 종합하여 작전을 펼쳐나가는 야구를 이름한 것이었습니다. 곧 강공이냐 번트냐 좌타자냐 우타자냐의 선택 기준은 결코 데이터가 아니라 그 날 현장에서 스스로 느끼고 판단한 감독의 창조적 직관이란 것입니다. 바로 지금 눈앞에서 활발히 움직이며 생생히 살아있는 '인간의 야구'입니다.

USA 중앙일보 구자겸 스포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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