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단 데뷔「높은 벽」무너진다|신생 문예지 신인 배출 홍수|절차 무시 작품집 자비 출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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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문단 등단 제도가 느슨해지면서 권위주의적 문단이 붕괴돼가고 있다.
일간지의 신춘 문예, 문예지의 추천 제도나 신인상 제도 등을 통해 소수 정예들 만 뽑아 편입시킴으로써 권위와 작품의 질을 유지했던 것이 기존 문단이었으며 신인을 많이 배출할수록 문예지의 질과 권위가 떨어진다고 인식, 주요 문예지들은 한해 많아야 10명 안팎을 문단에 내보내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88년 출판 자유화 조치 이후 쏟아지고 있는 신생 문예지들은 신인들을 앞다퉈 대량 배출, 그 동안 탄탄히 지켜졌던 등단의 벽을 허물어버렸다. 신생문예지 최근호들을 살펴보면 신인상이나 추천형식으로 문예지당 한 해 50여명을 문단에 쏟아 붓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와 함께 기존의 주요 문예지들도 초회·2회·천료 등 3차에 걸쳐 추천, 완벽성을 기하던 추천제도를 단 1회로 단축하는 추세고 등단 절차를 아예 무시, 자비 출판으로 작품집을 더 내 스스로 문단에 나오는 사람들이 늘어 이제 기존의 등단제도는 무색해진 상태.
등단 제도의 붕괴는 문학의 자유 시장 체제 편입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이 있으나 데뷔 작품은 대체로 작가의 대표작으로 남을 만큼 그 작품성이 뛰어나야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설익은 작품을 내보냄으로써 독자들에게 순수 문학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심는다는데 문제가 있다.
익명시·낙서시 등 시 아닌 시, 즉 상업 문학이 베스트셀러에 올라 독자를 오도하는 문학시장에 버젓이 문예지 데뷔작으로 오른 작품이 설익었다면 순수 문학과 상업 문학의 구분이 깨져 결국 문학의 순수성을 지키는 문단이 붕괴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신인들의 양산에 대해 시인 오세영씨(서울대교수)는 『권위주의 문단에서 자유주의 문단으로 가는 과도기적 현상』이라며 결국 끼리끼리 부추기고 커 가는 기성문단의 폐쇄적 권위주의가 이 같은 결과를 초래한 것으로 봤다. 때문에 오씨는 『이제 우리에게도 구미나 일본 등과 같이 누가 누구를 천거하거나 뽑는 등단 제도도, 그러한 사람들끼리 세를 형성하는 문단도 없어지고 오로지 개인의 작품성만으로 승부하는 문학의 자유 시장체제가 올 것』이라며 『문학의 자유 시장 체제에서 문학의 질을 수호하는데는 편집자·평론가 등 문학 관리층의 엄격성이 한층 요구된다』고 주장했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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