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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시평] 정치꾼보다 정치가를 밀어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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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현 정국은 언뜻 보면 절벽을 향해 여야가 자전거 페달을 힘껏 밟는 모습이다. 누가 더 철저히 망가지는가를 경쟁하는 게임인 것이다. 하지만 이 게임에서 국민은 절망을 볼 것이 아니라 희망을 보아야 한다. 정치의 큰 틀을 바꿀 절호의 기회를 맞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정치사는 깨끗한 정치가 더러운 정치의 자식임을 경험으로 웅변한다. 처음부터 깨끗한 정치를 한 나라는 없다. 미국 정치자금법의 효시인 1907년 타일맨 법만 해도 썩은 냄새가 진동했던 세기 말 정치의 결과였다.

나폴레옹은 "누가 최고의 전략가입니까"라는 질문에 "승자"라고 대답했다 한다. 이 국면에서 최고의 전략가는 여당도 야당도 아닌 국민이어야 한다. 정치인을 이롭게 했던 구 정치가 패자가 되고, 국민을 이롭게 하는 신 정치가 승자가 되어야 하니까. 우리는 미다스의 두 손을 가져야 한다. 한 손으로는 대선 자금 불법과 대통령 측근 비리를 철저히 밝히고, 다른 한 손으로는 한국 정치의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 어떻게 바꿀 것인가?

한국 정치는 그동안 '1987년 체제'의 정치 패러다임에 묶여 있었다. 그것은 민주화의 찬란한 성과를 업고 탄생했지만, 고비용 저생산성과 부패한 정치자금에 굴복한 정치체제였다. 이것을 저비용 고생산성과 투명한 정치자금 체제로 바꾸는 것이 급선무다. 이에 관한 한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4당이 모두 완전 선거 공영제와 지구당 폐지, 정치자금 투명화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제도 개혁에 대한 노무현 대통령이나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의 진정성이 느껴지기 때문에 어느 때보다 전망은 밝은 편이다. 이 개혁이 지킬 수 있는 제도, 그리고 탈법자들을 단호히 처벌할 수 있는 제도가 될 때까지 언론과 국민은 감시의 눈길을 떼선 안 된다.

정치 패러다임의 혁신을 생각할 때 이런 하드웨어의 개선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정치의 소프트웨어를 바꾸는 것이다. 그 핵심은 '정쟁의 정치'로부터 '경세(經世)의 정치'로 전환하는 데 있다. 돌이켜 보라. 한국 정치는 극단적인 권력 다툼의 정치였다. 세상의 문제를 어떻게 풀고 국민의 삶을 어떻게 따뜻하게 할 것인가에 대한 지혜로 경쟁하기보다 패거리를 지어 서로 헐뜯기에 바쁜 정치였다. 그래서 네거티브 정치가 포지티브 정치를 늘 압도했다.

'경세의 정치'는 모든 당이 원내 정책 정당으로 바뀌어야 가능하다. 또한 정치자금의 많은 부분이 정책 개발에 사용돼야 한다. 이를 누가 할 것인가. '경세의 정치'에서는 정쟁과 정략에 능숙한 사람들보다는 문제 진단과 정책 개발 능력이 있고, 갈등 조정 등 정책의 운용에 능숙한 경세가들이 주축을 이뤄야 한다.

"정치꾼은 다음 선거만을 생각하고, 정치가는 다음 세대를 생각한다"고 한다. 미래를 선택하는 정치가들로 정치 현장의 인적 혁신이 일어나야 한다. 각 당이 앞다투어 해야 할 인적 혁신의 방향이 바로 이것이다. '경세의 정치'에 적합한 각계의 정책 세력을 집단적으로 영입하는 경쟁이 개혁 공천의 핵심이어야 한다.

국민도 이제부터 모질게 마음을 먹자. 골목을 누비고, 밥 사주고, 상가집을 쫓아다녀 표를 얻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주어서는 안 된다. 다음 세대를 위해 무서운 공직의식을 가지고 헌신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주어야 한다.

"터럭만큼도 병들지 않은 것이 없으니, 지금이라도 이를 고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쓴 총체적 국가 개혁서 '경세유표(經世遺表)'의 동기를 이렇게 밝혔다. 원래 정치의 고유한 기능이 경세에 있다. 위기를 한발 앞서 발견하고, 문제 해결을 주도하며, 사회 각 주체들의 에너지를 끌어모으는 것이 정치의 고유한 역할인 것이다. 이런 정치 없이 이 복합성의 시대에 한국이 선진국이 될 수 있을까. 단호히 말해 없다. 깨끗한 정치 인프라 위에서 '경세의 정치'로 탈바꿈하기, 이것이 한국형 '마니폴리테'와 정치개혁이 조준해야 할 과녁이다.

박형준 동아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