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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23)-제85화 나의 친구 김영주(8)|평양 조선학병 사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나는 부평 조병창에서 도망쳤기 때문에 퇴학당했다는 설명을 한다음 이번에는 내가 그 일등병에게 질문했다.
『선배는 학범이지요.』
그는 내 물음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넌 평양에 오래 있을 작정인가』라고 반문했다.
『그건 무슨 뜻이지요.』
나는 그의 물음이 탈출의사가 있는가를 떠보는 것이라고 짐작하고 주위를 살펴봤다. 모두 무거운 발걸음으로 걷고 있어 우리 밀담에 주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여기에선 어렵지 않겠어요.』
『여기라니.』
『평양에서 말입니다.』
『응, 그 점은 지금 동지들이 연구중에 있다. 나는 네 각오만을 알고싶다.』
『동지들이라니, 학병들 말입니까. 꽤 많은 사람들이겠군요.』
『백명쯤 된다. 평양에 입대한 학병들은 대부분 중국대륙으로 전출됐고 지금 여기에 남아 있는 백명정도가 한꺼번에 궐기하기로 했다. 그 시기는 우리들이 뽑은 참모진에서 곧 결정을 내릴 것이다. 넌 참가할 것이냐, 안할 것이냐. 그것만 말하면 된다.』
『······.』
『네가 사상문제로 퇴학당했다니까 알려줬을 뿐이다. 참가여부는 네 자유다.』
『선배, 기꺼이 참가하겠습니다. 마음의 준비는 입대하기 전부터 되어 있었습니다. 꼭 부탁합니다.』
나는 그의 손을 힘껏 쥐었다. 결의의 표시였다.
우리들은 어느새 50부대 앞에 와있었는데 부대를 다시 정돈하는 동안 그는 『연락할 때까지 기다려라. 저 악질 지원병한테 걸리면 큰일나니 앞으로 우리들은 서로 모르는 체 하자. 그리고 내가 언제, 어떤 방법으로 네게 연락할지 모르니 너는 항상 날 살피고 있어라. 나는 일본 명치대학 출신 조명수다』고 했다.
『네』
나의 가슴에는 거친 파도가 출렁거렸다. 내가 입대한 곳은 「평양사단」 예하 「치중 50부대」로 병기·식량·군수품을 운반하는 수송부대였다.
다음날부터 우리들은 마치 얻어맞기 위해 입대한 것처럼 아침부터 저녁까지 얻어맞는 것이 일이었다. 급변한 환경으로 모두 얼빠진 사람이 돼버렸지만 나는 그 일등병이 언제, 어디에서 나타날지 그 일에만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후일 알게 됐지만 조명수 일등병은 일본 명치대학 문과생으로 소설가 이병주씨와 대학동창인 경기도 의정부 출신이었다.
당시 「평양사단」에는 나보다 8개월 먼저(l944년1월20일) 입대한 학병들이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학병을 피해 입산하거나 행방을 감췄지만 당국은 그들의 부모를 유치장에 잡아 가두고 아들을 찾아내라고 고문했던 것이다.
숨은 학생들을 수색하는데 앞장선 자들은 모두 조선인 헌병보나, 형사·경방단원들이었고 그들은 동족으로 조선인들에게만 있을수 있는 특이한 부자간의 정이나 약점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도망자들을 귀신처럼 잡아냈던 것이다. 그렇게 억지로 끌려나온 학병들이 어떻게 일본을 위해 충성하겠는가.
그들은 식사후면 매점에 모여 국제정세나 조선의 장래에 관해 신중하게 얘기를 나누곤 했다. 그리곤 차츰 자기들이 있는 사단전체를 폭파하고 독립군이 있는 국경으로 탈출하자는 데까지 의견통일을 보았다.
이것이 바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평양 조선학도병 사건」이었다.
이 학병궐기는 분하게도 「하야시(임)」라는 헌병보 군조(중사)의 밀고로 일망타진되어 그 웅지가 좌절되고 말았다. 하야시라는 헌병은, 즉 임영호라는 조선인 지원병이었는데 그는 다른 이름으로 해방된 대한민국에서 육군대령까지 지냈다.
당시 이 사건담당 검찰관 세본소좌(소령·경도대 법과출신)는 『일본 건국이래 l936년에 있었던 2·26사건 다음가는 반란으로 집단 무력항거와 집단 탈출음모를 획책한 반국가적 대사건』이라고 기소했었다.
주모자 박성화(조도전대)의 징역l2년을 필두로 5년 이상이 14명이고 30명 전원이 실형신고를 받았었다. 이중에는 지금 북으로가 김일성과 가까이 지내는 최홍희(전 한국군 육군소장·국제태권도연맹 총재)도 징역8년을 선고 받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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