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도 평양도 아닌 어중간한 말투"|본지 김경희 기자 소련 한국어방송 방문 취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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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최근 중앙일보 김경희 기자는 소련의 문화예술계 취재 차 현지에 다녀왔다. 소련 제재 중 김 기자가 돌아본 한국말 방송국의 이모저모를 소개한다. 【편집자 주】
소련 국립 TV·라디오 방송위원회 모스크바 방송국 한국말방송부 사무실 벽에는 한-소 두 나라의 대통령과 북한의 김일성·김정일 부자 사진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또 평양방송 펜던트·금강산 관광기념 액자가 서울시내 지도·대한항공이 만든 달력과 함께 여기저기 걸려 있었다.
이곳에서 방송과 번역 일을 맡고 있는 노치근씨에 따르면 한국말 방송은 모스크바 방송국이 불가리아·몽골·체코 등 75개 국어로 전세계에 내보내고 있는 외국어 방송들 가운데 하나. 최근 소련의 경제사정이 악화되면서 외국어방송을 졸여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으나 점차 발전되고 있는 한국과 소련의 우호관계에 비춰 볼 때 한국말 방송이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이 방송 관계자들의 이야기였다.
매일 오후2시부터 4시까지 두 시간씩 진행되는 이 단파 방송에 5명의 아나운서와 편집·번역 담당자 등 15명이 매달려 있다. 마침「아시아의 초점」이란 프로그램에서 인도 펀잡 족에 관한 뉴스를 방송하고 있던 아나운서 정 갈리나씨의 말투는 서울식모, 평양식도 아닌 그 중간쯤이었다. 정씨는 지난해 10월 평양에서 열린 범민족통일음악회에 취재 방송 차 다녀왔다고도 했다.
한편 중앙 아시아지역 알마아타시의 카자흐공화국 TV·라디오 방송위원회 조선말 방송국에서는 방송부장 최영근씨를 비롯한 5명의 기자·해설 원·아나운서·PD가 일하고 있었다.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오후2시40분부터 20분씩, 일요일에는 낮l2시30분부터 30분씩 각각 조선말 방송을 하는데 최근에는 방송시간이 너무 짧다는 불평이 동포들 사이에서 커지고 있다고 해설 원 박영준씨가 전했다.
지난 84년 카자흐 공화국 TV·라디오 방송위원회가 조선말 방송국에 독립채널을 주겠다고 제의했으나 꾸려 나갈 능력이 없어 카자흐 공화국 제1방송 채널을 일부 빌려쓰기로 했기 때문에 이제 와서 방송시간을 늘리려 해도 쉽지가 않다고.
기자가 이 방송국을 찾아갔을 때『천안삼거리』등의 민요와 현철·조용필·이미자씨 등 한국 가수들의 대중가요, 북한에서 인기절정인 가요『휘파람』등으로 다음주 일요일 방송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던 음악편집원 문 루드밀라씨는『2년 전까지만 해도 주로 평양노래뿐이었으나 88올림픽으로 한국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지자 서울에서 유행하는 노래의 비중이 매우 커졌다』고 말했다. 또 매달 한 차례씩은 KBS와 평양방송이 보내 주는 프로그램을 나란히 방송한다고. 이 방송국 직원들은「한극인」도「조선인」도 아닌「고려인」이란 표현을 쓰고 있는데, 사할린 한국어 방송국에서 일하다 온 경북출신의 1급 방송원 김옥려씨가 「서울 식 말」을 한다며 거부감을 표시했던 청취자가 많았으나 88 올림픽 이후로는 그런 불평이 없어졌다고 했다. 그러나 교포2, 3세로 넘어갈수록 모국어를 모르는 경우가 많아 인터뷰 프로그램을 만드는데 어려움이 많은 것 같았다.
박영준씨는『전체적으로 평양식 말투에 훨씬 익숙한 소련내 한국어방송 직원들이 좀더 부드럽고 세련된 서울 식 말투를 배울 수 있는 어학연수 기회가 많아졌으면 좋겠다』면서 머지 않아 한국어 TV프로그램도 생길 예정이므로 프로그램 제작 및 방송장비 등에 대한 모국의 지원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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