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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멋쟁이 촬영기사 정일성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요새 촬영기사들은 자신들을 촬영감독이라고 부른다. 그렇게 부르는 미국의 영향을 받은 모양이다.
이들 촬영감독들 중에서 사회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사람은 정일성(1929년생)이 아닐까. 국제적으로 유명한 작품들인 『만다라』(81년·임권택 감독), 『길소뜸』(85년·임 권택 감독), 『아다다』(87년·임권택 감독) 등의 촬영자일뿐만 아니라 그가 창조하는 화면들은 거의 다 시적으로 아름다운 영상의 흐름이라고 정평이 나있기 때문이다.
그는 『지상의 비극』(57년·조시두 감독)으로 데뷔한 이후 약80편을 촬영하고 있는데 그중 대종상에서 5회, 백상상에서 5회, 영평상에서 2회, 아세아영화제에서 1회 촬영상을 탔다. 게다가 KBS-TV 『영상시대』라는 프로의 해설자로 6개월간 출연, 영상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얘기했고, 또 지하철역마다에 붙어있는 대우비디오 선전용의 커다란 간판에 그의 얼굴이 나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억지로라도 그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한국에선 보기 드문 가죽모자를 쓰고 묘하게 세련된 복장을 하고 있는 그의 차림새는 아무리 보아도 독특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파리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와 모 대학에서 불문학을 가르치고있는 어느 여교수가 그 비디오선전용 간판을 보고 한국에도 저런 멋쟁이 남자가 있느냐고 중얼거리는 것을 필자는 들은 적이 있다.
촬영감독 정일성은 요새 작품 당 촬영료를 2천만원씩 받는다. 이것은 촬영감독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액수로 되어있다. 2천만원 받는 사람이 몇 사람 있고, 그 다음으로 1천5백만원 내외, 그 다음으로 1천2백만원 내외, 그리고 싸게 받는 경우 6백만원 내외를 받는 사람들도 있다.
정일성의 경우 조수가 7명인데, 그들에게 2천만원 중에서 5백만원쯤을 줘야한다. 그는 또 보너스계약을 하는데, 관객이 10만명 이상 들었을 때 소급해서 1인당10원 정도씩 받는다. 최근 67만명이 든 「장군의 아들』의 보너스로 새차를 구입했다.
서울대 공대 기계공학과출신의 그가 영화계에 투신하게된 동기는 그 당시 공대출신이 취직할 곳이 없었던 것도 이유였지만 이미 촬영기사로 활약하던 대학선배 정인엽(현 강원산업회장)이 와서 도와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정인엽은 영화광으로 『서울의 휴일』(56년·이용민 감독), 『망향』(58년·정창화 감독), 『별아 내 가슴에』(58년·홍성기 감독)등 7, 8편을 촬영했고 또 자신이 제작을 10여편 했던 사람이다. 그 당시 필자도 한두 번 그를 본적이 있는데 영화인답지 않게(?) 의외로 세련되고 부드러운 신사였다고 기억된다.
정일성의 본격적 촬영수업은 김학성의 조수로 3년 일하는 동안이었다. 김학성(1913년생)은 당초 『성황당』(39년·방한준 감독)으로 데뷔, 일제 때부터 활약하던 사람인데 한형모(1917년생)·이용민과 함께 몇 명 안 되는 일본촬영기사 자격증 소유자였다.
김학성은 권투를 했던 사람으로 초창기의 촬영기가 손으로 기계를 돌리는 것이어서 권투의 손 운동이 그 당시 촬영에 많은 도움을 줬을 것으로 보인다.
김학성은 최은희의 첫 남편이기도 했지만 자신을 늘 화려하게 가꾸고 다니는 취미가 있었다.
입고 다니는 옷만 해도 50년대에 벌써 캐주얼 한 것만을 걸치는 것이 잘 어울렸고, 목에 걸고 다니는 카메라를 비롯해 이것저것 묘한 액세서리가 다 그럴듯했다. 그리고는 항상 타임지니, 라이프지 따위를 옆에 끼고 다녔는데 그렇다고 해서 영문을 읽는 것 같지는 않았고 그 안의 스틸들을 주로 눈여겨보는 모양이었다.
현재의 정일성이 걸치는 옷가지 하나 하나가 다 평범한 것이 없고 독특한 것으로만 골라 입는 것은 그의 스승격이던 김학성의 영향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러한 김학성이 그의 제자에 대한 교육만은 엄하기 짝이 없었다.
필자는 정일성이 김학성에게 호되게 얻어맞는 광경을 우연히 본적이 있다. 영화계는 아직도 도제주의적 요소가 농후하게 남아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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