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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도시계획 국장|이권·외압 "살얼음"…운신 폭 빠듯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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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수서사태」로 가장 큰 곤욕을 치른 실무책임자의 한사람이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이었다.
감사원 특별감사에 이은 검찰수사로 파김치가 되도록 철야조사를 받은 끝에 결국 「정직」을 인정받았지만 사방에서 쏟아지는 의혹의 눈길은 한동안가시지 않았다.
멀리 볼 것도 없이 불과 9개월 전인 지난해 5월 전·현직 국장이 이권개입혐의로 나란히 구속된 기억이 세간에 생생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이란 자리는 수도서울의 미래상을 그리는 엄숙한 자리이면서도 도면의 선 하나로 수많은 시민·기업들의 엄청난 재산상 희비가 엇갈려 조심스럽기 그지없는 자리이기도 하다.
현 김학재 국장까지 16대에 걸쳐 15년째 자리가 바뀌는 동안 꼭 절반인 7명이 구속이나 숙정·문책 등으로 불명예 퇴진했다.
이 때문에 도시계획국장은 「험한 자리」 「팔자 사나운 자리」에서 「그 좋다는 자리」 등 각종 오명이 곧잘 붙어 다닌다.
그러나 아이로니컬하게도 역대 국장들 대부분이 「당시 가장 유능하고 소신 있던 간부」란 평을 듣고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모든 분야의 뚜렷한 서울집중현상, 그리고 「건설제일」을 부르짖어온 사회상황으로 인해 「도시계획국장의 능력이 곧 시장의 역량」으로 평가되면서 시장의 오른팔 역을 충실히 해낼 인물이 요구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술직공무원에겐 자연스레 선망의 자리가 돼왔다.
업무와 관련, 이권과 외압이 만만찮다는데 대해선 상반된 얘기들이 쏟아진다.

<5·16후 국으로 승격>
『재산과 민원이 직결된 일인데 이권개입이 없을 수 있겠는가. 없었다면 일을 게을리 했다는 얘기』라는 주장과 『어떤 청탁도 안 되는걸 되게 할 순 없다. 역대국장 출신 중 재산을 모은 자가 있었나』는 반론이 대립한다.
또 『여태까지의 도시계획자체가 그때마다 밝힐 수 없는 흑막과 배경을 깔고 있다』는 측과 『안으론 시장에서 부하직원까지, 밖에선 건설부 등 관련기관과 반대 민원집단이 손바닥 보듯 감시하는데 무슨 일을 저지를 수 있겠느냐』는 옹호론도 만만찮다. 현직 관계직원들은 『70년대 서정쇄신 이후엔 부정이 거의 사라졌다』고 하는데 반해 전직관계자들은 『과거엔 「찬밥」이었으나 80년대 중반 아파트 붐과 부동산값 폭등이후 이권개입소지가 커졌다』는 엇갈린 설명을 하기도 한다.
결국 개인의 성향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며 섣부른 판단은 자칫 본인들의 명예를 해치는 경우도 있다.
서울시에 도시계획국장 자리가 처음 생긴 건 5·16군사쿠데타 8개월 뒤인 62년1월27일 군사혁명위의 「서울시행정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제정·공포되면서부터. 조치법에 따라 7국 33과의 조직이 11국 44과로 개편되면서 건설국 산하 도시계획과가 국으로 승격됐다.
거의 정지상태의 도시계획에 시동이 걸린 셈이다.
이후 29년 동안 24차례나 소관업무의 조정이 이뤄진 끝에 현재는 도시계획·시설계획·도시개발·지적과 등 4과에 14계가 있다.
주요업무는 도시기본계획과 토지이용계획의 수립·조정, 도시계획시설의 계획, 지적측량, 택지개발계획, 구획정리사업, 국토이용관리법에 의한 토지거래 총괄, 폭25m 이상의 간선도로·광장·철도·운하·항만·공항·녹지시설의 계획수립 및 조정 등.
얼핏 딱딱해 보이지만 대상지역의 주민·기업·업자 등에겐 그야말로 「선 하나에 막대한 재산이 왔다갔다하는」 일들이다.
지난해 5월 무교동 재개발지구 내 유진관광호텔 건축허가와 관련, 전·현직 도시계획국장과 구청장 등 4명이 뇌물수수혐의로 구속된 직후 재개발업무는 주택국으로 넘어갔다.
관계자들이 밝히는 로비·외압의 가능한 형태로는 ▲도로계획선 ▲용도지역 지정이나 변경 ▲학교·공원 등 용지의 해제 ▲개발관련정보 유출 등이 있으나 이해의 대립이 필연적이어서 결코 「원칙」을 벗어날 수는 없는 게 상식이다.

<평균 22개월 재임>
「융통」이 가능한 경우나 「급행료」성격의 이권도 안팎의 심한 「견제」로 결국 대부분 드러나게 돼 갈수록 개입의 소지는 거의 없다는 게 실무자들의 주장이다.
15명에 이르는 역대 국장의 평균재임기간은 22개월 4일로 대충 한사람이 한명의 시장을 「모신」꼴이다.
최단명은 전 체육차관 김진원씨(57)로 80년7월부터 60일 동안 재임한 뒤 내무국장, 부시장을 거쳤으며 최장수 국장은 3년1개월의 8대 홍석철씨.
홍씨와 6대 손정목(현 시립대교수)·7대 곽후섭(현 롯데캐논사장)씨 등 3명을 제외한 12명이 기술직으로 건축학 전공인 4대 윤진우씨를 뺀 11명이 토목전공.
8대 홍씨까지는 외부에서 간부로 발탁돼 국장으로 성장한 케이스고 9대 김병린씨(55·현 미라보건설 대표)부터는 대체로 주사·서기로 출발한 정통 서울시관리.
초대 이상련, 2대 이헌경씨의 재임4년은 도시계획추진의 준비기로 자리자체가 다소 생소한 때였다.
본격 각광은 김현옥 시장 부임직후인 66년7월 발탁된 3대 주우원씨 때부터 시작된다.
그는 김 시장의 절대적 신임을 받은 충실한 「오른팔」로 영동 및 여의도개발착수, 광화문지하도 등 숱한 지하도와 터널의구상과 공사를 맡아 의욕 넘치게 추진, 김 시장의 별명에 빗댄 「작은 불도저」란 이름을 얻었다.
그는 특히 재임1년만인 67년8월15일 시청 앞 광장에 합판으로 2백평 크기의 가건물을 지어 당시까지 수립된 서울시내 전 지역의 도시계획도면을 전시, 일반에 한달 간 공개한 것으로 유명하다.
숙명여대생 50명을 아르바이트로 동원해 안내를 맡겼으며 전지 수백장분의 도면을 보러 연인원 1백만명이 구름 떼처럼 몰려 공람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시민들이 알 권리가 있다』며 그전까지 소위 「책상 밑에서」 해온 도시계획을 최초로 일반 공개한 것으로 당시 「도시계획의 쿠데타」란 호평을 받았다.
주 국장은 70년 와우아파트 붕괴사건의 책임을 지고 김 시장을 따라 물러났다.
그가 착수한 영동·여의도·잠실개발은 4대 윤진우·5대 이상련(초대역임)·6대 손정목·7대 곽후섭씨 등에 의해 계속보완 추진돼 이들이 재임한 약10년간은 「서울도시계획의 황금기」란 평을 듣는다.
4대 윤 국장은 특히 건설부근무경력의 인연으로 건설부와의 업무협조를 매끄럽게 이뤄내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국정감사장에서 양담배를 피우다 모 야당의원에게 적발돼 질책 받은 뒤 「켄트국장」이란 별명을 얻기도 했으며 81년 민한당 소속으로 경주지역에서 11대 국회의원에 출마했다 낙선했다.

<「켄트국장」별명도>
현재 서울시립대 도시행정학과교수인 6대 손 국장은 도시계획을 전공한 행정고시 출신의 엘리트로 영동개발 등을 본격화하고 소공·서린·무교 등 20여 곳의 재개발계획을 세운 장본인. 「자칭 천재」란 별명을 들은 그는 『도시계획의 근본목적은 안락한 삶』이라며 도로위주의 계획을 주거환경 위주로 전환하는 「도시계획 심리이론」을 도입했다.
공화당 청년부장·청와대 비서실을 거쳐 서울시에 들어온 후임 곽씨는 제2부시장 시절인 78년 현대아파트 특혜분양사건으로 구속돼 물러났다.
이어 군 출신인 8대 홍석철씨도 체비지인 강남터미널 부지를 율산그룹에 수의계약 해준 사실이 드러나 재임 3년 만인 79년6월 문책됐다.
불명예 하차는 9대에도 계속돼 김병린 국장이 80년5공의 공직자숙정 바람에 휩쓸려 물러났다.
서울대공대출신으로 도시계획이론에 밝아 「수재」소리를 들었던 그는 도시계획과장시절 현재의 성산대로를 안양∼성산대로∼금화터널∼북악터널∼의정부로 통하는 도시고속화도로를 구상하는 안목을 발휘하기도 했으나 구자춘 시장에 의해 사직터널∼중앙청으로 설계가 변경됐다.
김 국장의 숙정에 대해선 「호남출신이었기 때문」이란 뒷 얘기가 한동안 돌기도 했다.
12대 안상영씨(53·현 해운항만청장)는 81년부터 3년간 박영수·김성배·염보현씨 등 3명의 시장을 보필하며 실력·추진력을 인정받았으며 특히 독선적인 염 시장에게 굽힘없이 소신을 주장, 「소신파」로 통했다.
13대 김인식씨(55)는 올림픽대로 건설 등 올림픽 준비에 바빴던 사람으로 전임 안씨에 이어 염 시장에게 서슴없이 직언하는 유일한 간부였으며 도로·교통에 일가견을 가져 올림픽대로 노량대교의 8차선 화를 주장했으나 염 시장이 끝내 4차선을 고집하는 바람에 뒤에 극심한 변목체증을 초래했다.
김씨는 종합건설본부장으로 있던 지난해 유진 관광호텔 뇌물사건으로 15대 김영수국장(52)과 함께 구속됐으나 두 사람 모두주위로부터 「유능하고 아까운 인물」이란 아쉬움을 듣고 있다.
기술고시출신의 토목학사인 현 김학재 국장은 수서 사건 수사에서 드러났듯 융단폭격처럼 퍼부은 외압에도 끝내 「부가」를 주장, 소신을 인정받았으나 수서파문으로 최악으로 위축된 도시계획업무를 앞으로 어떻게 펴나갈지 궁금하다.
서울의 도시계획이 당분간 무사안일의 공백을 겪지 않을까 우려하는 목소리가 사방에서 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김석현·박종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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