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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떠오르는 '베이징 공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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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한 나라가 성공적인 경제성장을 위해 취해야 할 정책으로 '워싱턴 컨센서스'라는 게 있다.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이 자리 잡은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서 나왔기에 붙은 말이다. 워싱턴 컨센서스는 이중환율 폐지, 인프라용 재정 지출, 재산권 보장 등 기본 경제 안정 정책 다섯 가지와 민영화.탈규제, 무역 및 금융 자유화 등 개방 정책 다섯 가지 등 모두 10가지 정책 권고를 말한다. 이에 따라 10가지 정책을 동시에 추진한 남미 여러 나라의 경제 성적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그러자 워싱턴 컨센서스가 만병통치약이 아니라는 비판이 나오면서 지금은 위세가 많이 꺾였다.

하버드대의 로드릭 교수 같은 이는 워싱턴 컨센서스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개방.자유화 정책을 나중에 추진한 한국과 대만의 성적이 좋았다는 사실을 들어 동아시아식 단계적 모델이 더 적절한 발전 전략이라는 주장을 폈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성공을 정책 순서만으로 설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이들 국가에서는 10가지 정책 이외에 기술혁신과 고등교육의 두 가지 요소가 발전의 원동력이 됐기 때문이다. 실제로 1980년대 초 한국과 남미 각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구개발 투자는 다 같이 0.5%에 불과했다. 하지만 현재 한국은 그 비율이 2.7%로 뛰어올랐고 남미는 아직 1%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다. 연령 대비 대학생 비율로 본 고등교육 수준도 80년대 초 비슷했으나 지금 한국은 70%를 넘은 반면 브라질은 20%에 못 미친다.

워싱턴 컨센서스의 퇴조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최근 사례는 중국의 경제 기적이다. 경제적 성취에 자신감을 얻은 중국에선 이른바 '베이징 공식(共識)'이란 단어가 유행이다. 이는 공통인식이란 뜻으로 컨센서스의 중국어 표현이다. 중국 정부는 얼마 전 아프리카 각국의 정상들을 베이징에 모아놓고 이 중국식 발전 모델을 선전하기도 했다.

중국의 경제성장 배경에는 기술혁신과 고등교육에 대한 정부의 열의가 있다. 1인당 국민소득이 남미의 3분의 1도 안 되는 중국의 GDP 대비 연구개발 투자비율이 벌써 1.5%를 넘어섰다. 연구개발 투자의 절대금액은 일본을 추월해 미국에 이어 세계 2위 수준으로 올라섰다. 고등교육의 확충을 위해 중국은 98년 이래 매년 20%씩 대학생 정원을 늘려 이제 연령 대비 대학생 비율이 20%를 넘어섰다.

중국은 워싱턴 컨센서스의 정책 권고 가운데 개방.자유화 정책을 점진적으로 추진한다는 점에서 동아시아 모델에 가깝다. 그러나 중국이 워싱턴 컨센서스를 무색하게 한 더 큰 이유는 정치적 독재와 경제성장이 공존한다는 점이다. 남미에서 워싱턴 컨센서스가 실패한 데 대한 주류 경제학의 변명은 기본적 제도(민주주의, 법치, 부정부패 억제)가 불충분해 좋은 정책이 먹혀들 수 없었다는 것이다. 중국의 경제성장은 이런 주장 역시 틀렸다는 것을 보여준다. 과거 한국처럼 중국은 경제성장을 이룬 후 민주화의 길을 걸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까지는 중국의 발전 과정이 주변 국가의 경험과 같다. 그러나 '베이징 공식'에는 과거 한국이나 대만에는 없었던 몇 가지 전략이 들어 있다. 첫째는 대학이나 연구소의 지식을 곧바로 산업화하는 방식으로 등장한 레노보.팡정.둥팡 등 학교기업의 육성이다. 둘째는 한국의 쌍용차와 미국 IBM의 싱크패드 같은 외국기업의 인수로 기술과 브랜드를 확보함으로써 추격의 시간을 줄이는 국제 인수합병 전략이다. 셋째는 외자 기업으로부터 기술을 흡수해 토착기업을 일으킨 후 외자기업을 추격해 버리는 수평적 학습전략이다.

'베이징 공식'이 정말 성공할지는 설계기술의 확보, 부품.소재의 국산화, 자기 브랜드의 육성, 민주화라는 산을 넘느냐에 달려 있다. 이를 앞세운 중국의 추격이 무섭다.

이 근 서울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