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대의 로드릭 교수 같은 이는 워싱턴 컨센서스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개방.자유화 정책을 나중에 추진한 한국과 대만의 성적이 좋았다는 사실을 들어 동아시아식 단계적 모델이 더 적절한 발전 전략이라는 주장을 폈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성공을 정책 순서만으로 설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이들 국가에서는 10가지 정책 이외에 기술혁신과 고등교육의 두 가지 요소가 발전의 원동력이 됐기 때문이다. 실제로 1980년대 초 한국과 남미 각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구개발 투자는 다 같이 0.5%에 불과했다. 하지만 현재 한국은 그 비율이 2.7%로 뛰어올랐고 남미는 아직 1%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다. 연령 대비 대학생 비율로 본 고등교육 수준도 80년대 초 비슷했으나 지금 한국은 70%를 넘은 반면 브라질은 20%에 못 미친다.
워싱턴 컨센서스의 퇴조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최근 사례는 중국의 경제 기적이다. 경제적 성취에 자신감을 얻은 중국에선 이른바 '베이징 공식(共識)'이란 단어가 유행이다. 이는 공통인식이란 뜻으로 컨센서스의 중국어 표현이다. 중국 정부는 얼마 전 아프리카 각국의 정상들을 베이징에 모아놓고 이 중국식 발전 모델을 선전하기도 했다.
중국의 경제성장 배경에는 기술혁신과 고등교육에 대한 정부의 열의가 있다. 1인당 국민소득이 남미의 3분의 1도 안 되는 중국의 GDP 대비 연구개발 투자비율이 벌써 1.5%를 넘어섰다. 연구개발 투자의 절대금액은 일본을 추월해 미국에 이어 세계 2위 수준으로 올라섰다. 고등교육의 확충을 위해 중국은 98년 이래 매년 20%씩 대학생 정원을 늘려 이제 연령 대비 대학생 비율이 20%를 넘어섰다.
중국은 워싱턴 컨센서스의 정책 권고 가운데 개방.자유화 정책을 점진적으로 추진한다는 점에서 동아시아 모델에 가깝다. 그러나 중국이 워싱턴 컨센서스를 무색하게 한 더 큰 이유는 정치적 독재와 경제성장이 공존한다는 점이다. 남미에서 워싱턴 컨센서스가 실패한 데 대한 주류 경제학의 변명은 기본적 제도(민주주의, 법치, 부정부패 억제)가 불충분해 좋은 정책이 먹혀들 수 없었다는 것이다. 중국의 경제성장은 이런 주장 역시 틀렸다는 것을 보여준다. 과거 한국처럼 중국은 경제성장을 이룬 후 민주화의 길을 걸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까지는 중국의 발전 과정이 주변 국가의 경험과 같다. 그러나 '베이징 공식'에는 과거 한국이나 대만에는 없었던 몇 가지 전략이 들어 있다. 첫째는 대학이나 연구소의 지식을 곧바로 산업화하는 방식으로 등장한 레노보.팡정.둥팡 등 학교기업의 육성이다. 둘째는 한국의 쌍용차와 미국 IBM의 싱크패드 같은 외국기업의 인수로 기술과 브랜드를 확보함으로써 추격의 시간을 줄이는 국제 인수합병 전략이다. 셋째는 외자 기업으로부터 기술을 흡수해 토착기업을 일으킨 후 외자기업을 추격해 버리는 수평적 학습전략이다.
'베이징 공식'이 정말 성공할지는 설계기술의 확보, 부품.소재의 국산화, 자기 브랜드의 육성, 민주화라는 산을 넘느냐에 달려 있다. 이를 앞세운 중국의 추격이 무섭다.
이 근 서울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