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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지철의 야심(청와대비서실:1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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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경호실장=2인자」부각에 혈안/서열무시 비서실장보다 웃자리 고집/“독 묻었을지도…”결재서류 먼저 봐
국가원수의 경호실장은 현군이건 독재자이건 목숨을 걸고 주군을 지키는 「방탄조끼」나 다름없다. 국가원수에겐 언제 어떤 사람이 목숨을 노리고 덤벼들지 모르기 때문이다.
군사열식장에서 이집트의 권력자 사다트에게 기관총세례를 퍼부운 전복세력이 있는가하면 자신이 짝사랑하는 여배우 조디 포스터의 관심을 끌기위해 레이건에게 총상을 입힌 정신이상자 힝클리같은 사람도 있다.
때문에 경호실장은 국가원수의 절대신임을 배경으로 항상 자신의 생명을 담보해 임무에 응한다.
박종규 경호실장은 74년 8·15 국립극장에서 단상을 향해 불을 뿜는 문세광의 총탄사이로 두손에 피스톨을 움켜쥐고 용수철처럼 뛰쳐나갔다. 이 장면은 당시 경축식을 생중계한 TV화면을 통해 많은 국민이 생생하게 목격했었다.
이처럼 경호실장의 기본임무는 국가원수에 대한 위해를 방어하는 것이다. 그러나 경호실장의 영역은 단순히 여기에 머물지 않는 것이 권력의 생리다.
경호실장은 권력자의 물리적 생명은 물론 정치적 생명까지도 지켜나가겠다는 이른바 「정권경호」의 충동을 곧잘 느끼게 된다.
권력이 법률과 제도에 의해 적절히 통제되는 선진 민주국가에서는 좀 덜하지만 통치자 개인이 권력을 독점해 좌지우지 하는 후진적 권력구조속에선 이런 현상이 특히 심하다.
○밤시중 들며 충성
박정희 대통령시절 박종규·차지철 두 경호실장은 채홍으로 밤시중을 들며 박대통령의 심기를 편안하게 해주는 「심기경호」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고 정치적 골칫거리를 사전사후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않고 해결해주는 것 또한 「보위경호」란 이름아래 다반사로 저질렀다.
굳이 두 경호실장간의 차이점을 지적한다면 박종규가 심기경호에 치중한 반면 차지철은 보위경호에 집착했다는 것이다.
차실장은 평소 『경호실은 대통령의 신변만을 보호하는 곳이 아니다. 박대통령이 도전을 받아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면 우리 경호실은 무슨 소용이 있는가. 경호실은 대통령의 자리까지도 보위해야한다』는 소신을 측근들에게 강요했다. 말이 보위경호지 차실장의 본심은 「경호실장=정권의 파수꾼=2인자」라는 등식에 매달려 있었다.
차지철의 경호실장관에 대한 10대 유정회의원 K씨의 증언.
『차실장은 「모든 힘과 정보는 경호실을 통해야한다」는 철학을 가졌던 사람이었어요. 10·26직후 청와대에 마련된 박대통령의 빈소에서 만났던 어느 장관은 이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차실장은 장관들에게 대통령 결재를 받을 문서는 꼭 하루전에 자기방에 갖다놓도록 요구했대요. 장관들이 의아스럽게 생각하니까 차실장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더래요. 「일본명치유신때 어느 신하가 왕에게 올리는 문서의 귀퉁이에 독약을 발라놓은 일이 있었다」는 거죠.
왕이 손가락에 침을 발라 문서를 한장한장 넘기는걸 이용해 독살하려 했다는 겁니다. 때문에 장관들로서는 기분나쁠지 모르지만 각하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양해하라고 했다는 거예요. 차실장은 그렇게해서 대통령한테 올라가는 각종 기밀과 중요 문건을 미리 파악했고 사실상 정보를 독점하다시피 했죠.』
차실장이 경호실장직을 통해 「2인자자리」에 얼마나 집착했는가에 대해서는 수많은 일화가 있다. 오랜 측근이었던 H씨는 이렇게 증언했다.
『차실장은 종종 「나는 각하를 모시는 특별참모」라는 말을 했어요. 세컨드 맨이란 뜻이었죠. 차실장은 「각하를 빼놓고 나보다 앞설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누구의 승용차도 내 차를 앞서 갈 수 없다」고 해 비서실·경호실이 모두 의전때문에 애를 많이 먹었죠. 월간경제동향보고회같은 공개된 자리에서 차실장은 늘 1순위를 고집했어요. 직책 서열로 따지면 엄연히 비서실장이 위니까 대통령의 오른쪽에 비서실장이,왼쪽에 경호실장이 앉아야 되거든요. 그런데 차실장이 이걸 뒤집어버렸어요.
차실장은 경호실장이 비상시에 사태대처를 잘하려면 출입문 가까이에 앉아야한다고 했죠.
김정렴 비서실장이 원래 그런데는 무던해 그냥 넘어갔지 그가 깐깐하게 따지는 사람같았으면 신경전이 꽤나 벌어졌을 거예요.』
경호실이 권부의 구심점이 되어야한다고 믿은 차실장은 경호실 전체의 위상을 높이는데도 무척 열성을 쏟았다. 우선 경호부대의 숫자와 병력수를 부쩍 늘렸으며 유명 교수·목사들을 불러 경호실요원에 대한 정신교육을 강화했다.
차실장을 가까이에서 보좌했던 Q씨는 경호실이 눈에 띄게 커지는 과정을 설명했다.
○「보위경호」강조
『차실장이 취임했을때 경호실은 잔뜩 풀이 죽어있었어요. 박대통령의 연단에 총알이 날아들고 영부인이 저격당해 숨진 마당에 대통령경호실이 무슨 할말이 있었겠습니까. 차실장은 경호실의 사기를 살리고 경호체제를 좀더 죄어야 겠다고 마음먹었죠.
그래서 우선 편제를 고쳤습니다. 차장밑에 행정·작전차장보를 새로 만들어 현역준장으로 보임했고 차장은 현역소장을 임명했지요. 청와대안과 외곽경비를 담당하는 수경사 30·33대를 대대급에서 여단급으로 격상시켰고 헌병으로 새 팀을 하나 만들어 사복외곽경호를 맡게했죠. 그러더니 얼마 안 있어 일단 유사시 수경사령관의 작전지휘권을 경호실장이 갖도록 법을 고치더군요.
정신전력도 강화했지요. 예배와 기도에 철저했던 차실장은 원로목사들을 초빙해 경호실요원들과 함께 예배를 보고 설교를 듣기도 했어요. 그는 신앙이 정신무장에는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던거죠. 예배는 매주 월요일 오후5시에 있었는데 한경직·박조준·조용기·강신명 목사등 당대의 거물급 목사들과 김용기 장로등이 초빙되어 왔었죠.
차실장은 또 1주일에 한번씩 경호실직원 1백여명을 모아놓고 대학교수의 특강을 듣도록 했어요. 대통령과 정권을 보위하기 위해선 총만 잘 쏠게 아니라 나라안팎으로 세상돌아가는 것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요.
매주 토요일 오전에 있었던 특강엔 서울대의 최종기·박봉식·조순·노재봉·이홍구교수와 외대의 김덕 교수등이 나왔어요.
차실장은 국회외무위원장때부터 국제관계세미나등을 갖는 등 이들 교수들과 꾸준히 친분을 맺어왔었죠. 차실장은 이들 교수들을 박대통령에게 소개해 만찬을 주선하기도 했어요.
박대통령은 대학가의 유신독재반대 데모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고,교수들도 조심스럽게 문제제기를 해 어떤 때는 묘한 분위기가 흐르기도 했어요. 박대통령은 교수들과 기념촬영을 하면서 「이 사진 나가면 당신들은 모두 어용교수로 몰리는 것 아니냐」는 농담을 해 웃음이 터진 적이 있죠.』
차실장은 경호부대원들의 충성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작곡가 박춘석씨에게 부탁해 『경호원가』를 만들기도 했다.
당시 대통령부속실을 담당했던 김두영 전 사정비서관이 전하는 일화 한토막.
『경호실에 배속된 경찰과 수경사경비단 병력은 임무교대를 할 때면 청와대본관에까지 들릴 정도로 우렁찬 목소리로 경호원가를 불렀어요.
○병력등 대폭 늘려
대부분의 가사내용이 박대통령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는데 몇몇 부분은 박대통령을 우상화하는 내용이었어요.
「이나라 이겨레 구원자 되신님의 뜻을 받들고자 여기 모였네」같은 표현이 그랬지요.
원래 면전에서 간질간질한 소리하는 것을 싫어하는 박대통령은 그 부분이 듣기 거북하다며 근혜양에게 중지하도록 연락하라고 시키셨죠. 내가 차실장보좌관에게 직접 전화를 했어요. 박종규 실장같았으면 두말없이 박대통령의 생각을 따랐을텐데 차실장은 달랐어요.
다음날 차실장은 노래테이프와 가사를 들고 박대통령에게 찾아와 재고를 요청하더라구요. 차실장이 그렇게 나오니 박대통령도 마음이 바뀌었는지 정 그렇다면 경호원가와 향토예비군노래를 섞어서 부르도록 하라고 지시했어요. 그 다음날부터는 두노래가 번갈아 들려왔습니다.』
경호원가의 가사내용이 보여주듯 박대통령에 대한 차실장의 외경과 충성심은 일반인의 상식을 초월한 것이었다.
그의 측근이었던 H씨는 『그는 잘때도 박대통령을 경호하는 꿈을 꾸었을 것』이라며 가까이에서 지켜본 차실장의 모습을 소개했다.
『그가 박대통령을 모시는데 치성드리는 걸 보면 어떤때는 결벽증환자 같았어요.
청와대별관 3층에 있는 경호실장방에는 본관의 대통령 집무실과 통하는 핫 라인이 있었죠. 대통령이 수화기를 들면 경호실장이 받도록 되어있는 인터폰인데 딱 한대 있었죠.
○박종규 세력 차단
차실장은 취임하자마자 「이래가지곤 어떻게 대통령의 부르심을 빨리 받을 수 있겠느냐,각하가 찾으시면 0.1초내에 받을 수 있어야지. 소파에도 한대 더 설치하라」고 지시하더군요. 며칠 지나더니 그것으로도 부족하다는 거예요.
경호실장이 화장실에도 가야하고 2층 식당에도 가야 하는데 그때는 어떻게 하느냐는 거죠. 그래서 인터폰을 내실·화장실·식탁·2층식당에 추가로 설치했죠.
그렇게 완벽한 장치를 해놓았는데도 차실장은 인터폰만 울리면 조금이라도 빨리 받기위해 몸을 날렸어요. 한번은 내실과 화장실 중간 어정쩡한 지점에 서있을때 인터폰이 울리자 급히 내실쪽으로 달려가다 발목을 삐끗해 인대를 다친 적도 있었죠. 다른 사람들한테 왜 다쳤는지 말도 못하고 끙끙 앓으면서 한동안 발을 절고 다녔어요.』
차실장은 박대통령과 관계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각별한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H씨는 이런 일화도 들려주었다.
『설날·추석같은 명절때나 김장때면 박대통령은 경호실에 하사금을 내려주곤 했어요. 보통 「대통령 박정희」라고 씌어진 봉투에 고액권이 가득 들어있었어요. 차실장은 박대통령으로부터 봉투를 받아오면 행정처장을 불러 「실장부터 보일러공까지 똑같이 나누어봐」라고 지시하는 거예요.
행정처장이 실장몫이라며 봉투를 가져왔는데 빳빳한 지폐 3만원이 들어있었죠. 실장방이어서 대통령이 보는 것도 아닌데 차실장은 부하가 봉투를 건네주면 일어나서 두손으로 깍듯이 받은뒤 현금을 소중히 꺼내 지갑속에 차곡차곡 넣었어요.
차실장의 충성심은 진짜 몸에서 우러나오는 것 같았어요. 차실장은 박대통령이 즐겨부르는 「으악새 슬피우는­」「전우의 시체를 넘고넘어」같은 노래를 녹음해 차안에서 틀어놓고 중얼중얼하기도 했는데 그 표정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죠.』
경호실을 장악한 차실장은 이를 기반으로 권부내에 파워를 구축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경쟁이 되거나 껄끄러운 사람은 견제하고 자기사람을 요소요소에 심는 작업을 벌였다.
차실장이 겨냥한 첫번째 포석은 박종규 전임실장의 영향력을 무력화시키는 것이었다. 13년동안이나 박대통령의 뇌리에 박혀있는 박실장의 모습을 지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보더라도 박실장은 박정희 소장에게 「차대위」를 소개시켜준 장본인이었고 혁명에 같이 목숨을 건 동지였으며 차실장이 정계에 진출한뒤에는 물심양면으로 뒤를 봐준 스폰서였다.
그러나 차실장은 경호실장에 임명되는 과정에서 박실장이 자기를 추천하지 않은데 좋지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차의 저돌적이고 곧잘 흥분하는 기질이 국가원수신변을 책임지는 경호실장으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한 박실장은 오정근 당시 국세청장을 후임에 추천했었다.
오청장은 5·16혁명 당시 해병대소령으로 혁명군의 선봉에 서서 헌병대와 교전을 벌여 한강인도교를 돌파했던 주체중의 주체였다.
그러나 박대통령은 김정렴 비서실장이 추천한 차지철을 선택했다. 김실장은 『차씨가 혁명주체로 충성심이 두터운데다 무술이 뛰어나며 국회의원으로서 박사학위도 따내는등 성실한 일면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천 이유를 밝혔다.
차실장은 후일 가깝게 지내던 국회의원 L모씨에게 박대통령이 『박실장과 JP(김종필)는 오정근이를 추천했는데 내가 자네를 골랐어. 박종규는 금전문제로 이곳저곳에서 말이 많았어. 나는 자네를 믿으니 쓸데없는 생각말고 경호업무에만 전념해봐』라고 하더라는 이야기를 실토한 적이 있다.<김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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