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자금 해법 고해성사] 기업 입 빌려 정치권 압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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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의 정치자금 수사 칼날에 맞닥뜨린 재계와 정치권에서 고해성사로 탈출구를 모색하려는 기류가 확산되고 있다. 전경련이 6일 정치권 고해성사 뒤 국민 동의 아래 사면, 기업의 회계처리 일괄 사면을 골자로 한 정치자금 제도 개선 방안을 내놓은 게 촉매제가 됐다.

검찰 또한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수사에 협조해올 경우 선처하겠다고 분위기를 띄웠다. 앞으론 검찰의 수사, 뒤로는 재계의 고해성사 압박에 완강하던 정치권도 변화를 보이고 있다.

대검 중수부가 6일 불법 대선자금 제공 기업들에 던진 '자수하면 선처'메시지가 민감한 반응을 불렀다.

정치권의 불법 자금 전모를 밝히되 기업 쪽에 대한 단죄나 혐의 공표는 억제하겠다는 게 검찰의 뜻이다.

아예 ▶입건 자체를 유예해 형사처벌을 면하게 해주거나▶'약식기소'라는 절차로 재판에 가지 않고 벌금만 내는 방안까지 제시했다.

검찰은 기업들에 대한 전면적인 수사가 국가 경제에 미칠 영향을 최우선으로 고려했다고 밝히고 있다. 불법 정치자금이라면 당연히 회계에 잡히지 않는 비자금을 사용했을 것이고, 그 비자금을 캐다 보면 분식회계 등 더 큰 불법 부분이 포착될 수 있음을 의식한 것이다.

"그런 혐의들이 수사대상이 돼 세상에 공개될 경우 기업의 신인도가 추락해 금융거래나 주가에 적잖은 타격을 주게 된다"는 게 검찰 관계자의 설명이다. 즉 수사를 통해 거두는 성과보다 잃는 게 훨씬 더 클 것이라는 복합적 판단을 했다는 얘기다. 거기에 기업들의 혐의점을 일일이 캐내기에는 현실적인 한계와 어려움이 크다는 점도 작용했다.

회장실을 비롯한 주요 사무실에 대해 대대적인 압수수색으로 많은 자료를 확보한 상태에서 시작한 SK 비자금 수사와는 상황이 한참 다르다.

정치권에서 기업들과의 위법 거래내용을 낱낱이 밝히지 않는 상태에서 기업들마저 입을 닫을 경우 감춰진 혐의를 끄집어내는 일은 사실상 '맨땅에 헤딩'을 하듯 어려운 일이라서다. 압수수색에 대비해 기업들이 관련 자료를 없애거나 숨겼을 경우 수사를 신속하게 마무리하겠다는 계획도 헝클어진다.

결국 불법 대선자금의 전모를 가장 효율적으로 밝혀내기 위해 '준 쪽(기업)'에서 협조를 받아낸 뒤 '받은 쪽(정치인)'을 압박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에선 기업에 대한 전면 수사의 명분쌓기 수순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어차피 정치인도, 기업도 불법 자금에 대해 순순히 자백할 가능성이 작아 기업체에 대한 강경 수사가 불가피할 것이기 때문에 "충분히 선처의 기회를 줬다"는 의미를 담는 차원이라는 해석이다.

한편 기업들은 이날 대체로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한 대기업 임원은 "아무리 검찰이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하더라도 '우린 이렇게 불법 자금을 제공했다'라고 말할 기업이 있겠는가"라고 물었다. 검찰과 재계가 아직은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결국 기업에 대한 검찰의 전면적인 수사가 불가피한 사태가 닥칠 가능성도 작지 않다.

강주안 기자<jooan@joongang.co.kr>
사진=안성식 기자 <ansesi@joongang.co.kr>

<사진 설명 전문>
이상수 의원이 6일 오전 당사에서 열린 분과위원장단 회의 도중 대선자금 계좌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메모를 하고 있다. 위에는 선대본부에 2개 계좌가 이상수 명의로 있다고 적었다. 후원회 계좌는 9개로 시.도지부별로 서울 4개, 제주 3개 계좌가 이상수 명의로, 경기.인천에 다른 명의로 각 한개씩 있다고 적었다. '실무계좌'라고 적은 밑에 '4개 후원회'라고 써넣고 밑줄을 긋고 있다. [안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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