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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호기자의문학터치] '이현의 연애' 심윤경 지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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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심윤경(34.사진)의 세 번째 장편 '이현의 연애'(문학동네)는 요즘 소설과 다르다. 단숨에 읽히지만 금세 식어버리는 요즘의 '쿨한' 소설과 한참 다르다. 그렇다고 익숙한, 그래서 오래된 소설은 또 아니다. 새롭지는 않지만, 익숙하지도 않다. 여하튼 소설은 다르다.

처음엔 애틋한 사랑 이야기인 줄 알았다. 빤한 사랑 얘기를 한껏 과장된 포즈로 노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거기에 글쓰기에 대한 작가의 고민이 슬쩍 얹힌 것 정도로 이해했다.

하나 책장을 넘길수록 소설은 달리 보였다. 고대 그리스 비극을 교묘한 세공작업을 거쳐 전혀 새것인 양 꾸민 흔적이 만져졌고, 치밀한 이야기 배치에선 독자를 상대로 수 싸움을 걸어오는 작가의 속내마저 읽혔다.

42세 남자 이현은 앞날이 창창한 재경부 공무원이다. 이현은 25세 여자 이진에게 한눈에 반한다. '피부에서 살구즙의 향기를 풍기고 빙하에서 방금 퍼올린 다갈색 구슬 같은 눈으로 바라보는 여인의 미모' 덕이 컸지만 둘의 사랑은 운명이 정해놓은 것이었다. 이현이 여섯 살 때 찍은 옛날 사진엔 이진처럼 살구즙 피부의 여자가 신부로 서있었다. 이현은 이 사진을 들고 이진을 찾아가고 이진은 사진 속 여자가 자신을 낳기 하루 전에 숨진 어머니라고 말한다. 운명을 확인한 둘은 이내 결혼하고, 결혼 3년 만에 이진은 자신을 빼닮은 딸을 밴 채 숨진다.

여기까지는, 익숙하다면 익숙한,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다. 이진의 미모에 대한 과장된 수사나, 운명의 장난이 아니고선 설명할 길 없는 둘의 사랑에서 옛 신화에서나 가능했던 사랑의 공식을 발견한다. 하나 이진의 비밀을 알고 나면 사정은 달라진다.

이진은 살아있는 자들의 영혼을 기록하는 사람이다. 이진에겐 영혼을 기록하는 일만 중요하다. 그녀는 하루에 14시간씩 자신을 찾아오는 영혼을 기록한다. 이현과 결혼한 것도 이현이 자신의 일을 방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서였다. 그러나 사랑은 깨진다. 이현이 자신의 기록을 엿봤기 때문이다. 거기엔 이현을 남달리 여기는 경제부총리의 영혼이 기록돼 있었다. 이현은 그 기록을 갈가리 찢어버리고 이진은 뱃속에 아기를 간직한 채 죽는다.

이진의 입장에 서면 소설은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일종의 소명에 관한 이야기다. 아무리 뿌리치려 해도 떨칠 수 없는, 소소한 일상(여기엔 사랑도 포함된다) 따위는 내팽개치고 애오라지 매달려야 하는 신성한 소임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영혼을 기록하는 일, 글쓰기에 대한 일종의 메타포다.

그러나 소설은 이보다 훨씬 복잡하다. 작가의 의중을 곱씹으며 소설을 끝까지 읽기 전까지는 곳곳에 잠복한 모종의 음모(!)를 감지하지 못한다. 아! 한 판의 게임이었구나, 소스라치며 깨달을 즈음이면 이미 소설은 막을 내린 뒤다. 당신은 진작에 패배한 것이다.

'쿨한 사람, 쿨한 관계, 쿨한 소설이 이 세상을 휩쓸어 버린 것이 어느 시점부터였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경쾌하고 은근한 노랫자락에 얹어서 똑같이 쿨하다고 착각해 버리기에는 너무나 쿨하지 못한 우리네 인생. 아무래도 사는 건 구차하고 남루하다.'

작가는 이태 전 발표한 소설 '달의 제단'에서 위와 같이 적었다. 차갑지도 못하고 뜨겁지도 못한, 하여 밋밋하고 미지근하기만 한 오늘. 여한 없이 뜨거운 소설 한 권을 읽었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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