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보는 패배” 6시간 배수진/예상대로 깨진 「제네바 담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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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협상보다 서로 강경입장만 전달
페만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마지막 기회로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킨 가운데 9일 제네바에서 개최된 미·이라크 외무장관회담은 당초의 지배적 전망대로 결국 실패로 끝났다.
예상과는 달리 두번씩이나 정회를 거듭하며 6시간 이상씩이나 회담이 계속돼 한때 뭔가 큰 진전이 있는게 아니냐는 성급한 기대를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결국 현재의 양국간 대결구도에서 이번 회담이 지닐 수 밖에 없는 뚜렷한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작년 8월 이라크의 쿠웨이트 점령에서 비롯된 페만사태를 둘러싸고 전개돼 있는 미·이라크간의 배타적 대치상황에서 이번 회담은 구조적으로 깨질 수 밖에 없게끔 돼 있다는 것이 회담을 앞두고 나온 일반적 관측이었다.
타협과 화해가 불가능한 것은 두나라가 마찬가지로,미국의 입장에서 이라크측에 촌보라도 양보할 경우 이는 침략자에게 상을 주는 있을 수 없는 결과가 될 것이고,이러한 사정은 이라크로서도 다를게 없다는 지적이다.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채 미국의 위협 앞에서 맥없이 주저앉는 것은 지금까지 중동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소리높여 외쳐온 이라크로서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로 사담 후세인의 눈에는 비춰지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처음부터 이번 회담은 「협상」을 위한 것이 아니었고,서로의 물러설 수 없는 입장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회담이 끝난 뒤 가진 기자회견에서 미국의 베이커 국무장관은 『미국은 이라크와 일체의 협상을 하지 않았고 기존의 입장을 직접 전달했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즉 미국은 이번 회담에서 페만사태와 관련해 유엔이 취한 12개의 결의는 미국만이 아닌 국제사회 전체의 이라크에 대한 결의로 이의 변경이나 완화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이 결의에 순응,오는 15일까지 이라크가 쿠웨이트에서 완전히 철수하지 않는한 무력에 의한 강제철수는 불가피하다는 일관된 입장을 이라크측의 면전에 대고 다시 한번 반복한 것이다.
또 이라크는 이라크대로 쿠웨이트 문제와 팔레스타인문제를 별개의 기준으로 다루는 미국의 「이중성」에 강력히 항의하면서 팔레스타인문제의 해결이 보장되지 않는한 쿠웨이트에서 물러날 수 없다는 기존의 입장을 되풀이 했다.
서로의 상반된 주장이 6시간30분동안 평행선을 달린 결과가 결국 예정된 실패로 끝난 것이다.
이번 회담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미국과 이라크로서는 어느면에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두나라 모두 당초부터 이번 회담에서 어떤 결과를 기대했던 것은 아니고 단지 평화를 위해 서로 최선을 다했다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대내외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서였다고 할때 이날의 마라톤회담은 서로에게 그만한 값어치가 있었다는 지적이다.
특히 미국으로서는 이번 회담을 통해 이라크의 확고부동한 자세를 다른 우방들에 확인시켜 줌으로써 서방의 결속을 다지는 한편 전쟁발발시 그 책임을 이라크측에 돌리는 확실한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서방의 결속에 가장 큰 위험요소로 지적돼온 프랑스가 이날 회담이 진행되고 있는 도중 그동안의 타협적 자세를 바꿔 미국의 입장에 확고하게 다가선 것이 벌써 이번 회담의 성과가 아니냐는 분석이다.
그러나 조만간 전쟁이 현실로 나타날 경우 과연 두나라가 서로의 주장대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미국은 『이제 전쟁이냐 평화냐는 선택은 이라크가 할 문제』라고 주장하고 이라크는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전적으로 미국에 달린 문제』라고 맞서고 있다.
이제 이라크의 쿠웨이트 철수시한인 오는 15일까지 남은 5일이 전쟁이냐 평화냐를 결정 짓는 중대한 시기가 되겠지만 과연 그 이후의 불행한 사태에 대해 지금처럼 두나라가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있을지는 두고볼 일이다.<제네바=배명복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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