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UAE의 10년 내다본 투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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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의 변방국에 머물렀던 아랍에미리트가 용틀임한다는 뉴스는 이젠 뉴스가 아니다. 그런데 다른 중동국가와 달리 이 나라가 제조업에도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세계 3위의 산유국이지만 머지않아 원유가 고갈될 때를 대비해 제조업 기반을 다지는 것이다.<본지 11월 30일자 e1면> 지난달 28일 대우일렉트로닉스와 손잡고 중동 최대의 가전공장 건설에 나섰고, 정부 지도자들은 세계 유수의 제조업체를 끌어들이는 데 솔선수범하고 있다.

산업이라고 해봐야 고작 진주조개를 캐는 것이 전부나 다름없던 아랍에미리트의 두바이가 중동의 관광.금융 중심지로 부상하고 있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 두바이와 함께 아랍에미리트 경제를 이끄는 또 다른 축은 아부다비다. 아랍에미리트의 수도이기도 한 아부다비 산업공단에는 대우일렉이 참여하는 가전 공장을 비롯해 50여 개의 유리.철강 업체들이 내년부터 기계를 돌린다.

아랍에미리트 지도자들의 자세를 보면 오일달러나 펑펑 쓰고 다니며 호기를 부리는 중동의 왕족과는 한참 거리가 있었다. 아랍에미리트 대통령의 외숙인 카일리 NIC(대우일렉 합작 파트너) 회장은 이승창 사장 등 대우일렉 경영진을 셰이크 별궁으로 초대해 합작 계약식을 하자고 했다. 이곳은 대통령을 비롯한 몇몇 아랍에미리트 지도자만이 쓰는 고급 별장이다.

계약 직후 그는 4륜 구동 승용차에 이 사장을 태우고 손수 운전을 했다. 한 시간 이상 주변을 안내하며 이 사장에게 "아랍에미리트가 홀로 설 수 있도록 경험과 기술을 전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그가 신발을 벗고 사막을 거닐자 이 사장도 신발을 벗었다고 한다. 아랍에미리트는 가전 공장이 완공돼도 자국 국민의 일자리를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는 점도 잘 알고 있었다. 공장을 돌릴 600여 명의 인력은 인도나 동남아시아에서 데려와야 한다. 이 사장은 "아랍에미리트 정부는 공장을 운영하고 인력을 관리할 노하우를 배우길 원했다"고 말했다. 10여 년을 내다본 투자라는 것이다. 아랍에미리트는 아직도 아부다비 지배자가 대통령을, 두바이 지배자가 총리를 나눠 맡을 정도로 민주주의의 뿌리도 약하다. 지도층의 결심이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한다. 그래서 그들이 경제에 올인하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게 보였다.

현지에서 본 TV의 '디스커버리 채널'에서는 인천경제자유구역(IFEZ)이 두바이에 못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며 투자를 권유하는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한 해에 수백만 대의 자동차를 생산하고 10조 원어치의 반도체를 수출하는 한국을 이제 산업화의 발걸음을 뗀 아랍에미리트와 비교하기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이 IFEZ가 잘되도록 아랍에미리트 지도층처럼 지원할까라는 생각에 미치자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기업의 투자 발목을 잡고 반기업 정서가 적지 않은 한국의 모습이 이제 막 사막을 갈아엎어 건설하는 아부다비 공단 모래 위에 신기루처럼 아른거렸다.

김창우 경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