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4)"참으로 옳은 것"인식세평 넓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5면

내가 최근에 부분적으로 다시 읽은 책 중에서 감동을 받은 책은 칸트의『순수이성비판』이다.「알아서」가 아니라 「알 것 같아서」감동을 받았다.「안다」는 것과「알 것 같다」는 것은 서로 다르다.
어느것이 우리 인간에게 중요한가. 「아는 것」이 중요한가,「알 것 같다」가 중요한가.「아는 것」이 중요할 때가 있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알 것 같다」가 더 중요해질 때가 있다.
「칸트를 알 것 같다」가 음악가에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칸트는 음악가에게 필요 없는 존재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칸트의 책은 철학자들의 전유물이라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하고있는 사람인 것 같다. 비록 철학자들만큼 칸트를 알 수는 없을지 모르나 나는 칸트의 책이 철학자들만의 소유물일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좋아하는 책에는 칸트의 것 이외에도 많다. 성경이 그 중의 하나다. 사람들이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은 어려운 책이라고 생각하고 성경은 쉬운 책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성경의 의미야말로 쉽게 풀려지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해석학이라는 학문분야가 생긴 태초의 이유가 성경해석의 문제점 때문이 아니었던가.
왜 지금 이러한 말을 하고있는가. 성경이 우리 모두의 소유일수 있듯이 칸트의『순수이성비판』역시 우리 모두의 소유가 되었으면 싶어서 하는 이야기다. 칸트는 철학자의 전유물로 생각하고 있고 성경은 신학자의 전유물로 생각하고 있지 않은 상식에 정당성이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참으로 옳은 것이 무엇인가. 나는 그것을 알고싶다. 그래서 엄밀한 음악학을 하고 싶다. 안다고 했을 때 그것이 참으로 옳은 것인지를 어떻게 아는가가 나에게는 항상 문제가 된다.『안다는 것의 가장 원초적인 근거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나에게는 항상 문제가 된다. 나와 같은 사정에 놓여있는 사람은 결국 음악가에게도, 칸트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다.
물론 칸트뿐만이 아니라 칸트 이외의 많은 철학자들의 엄밀한 사고가 음악가들에게 필요할 것이라는 것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다.
아버지 얼굴을 보고「아버지의 얼굴」이라는 것을 우리 인간은 안다. 여기서 아버지 얼굴을 알게되는 근거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우리는 던질 수 있다.「눈(감각)」이 있기 때문에 아버지얼굴을 그것으로 알게됐다고 대답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앎의 근원지는「눈」이다. 성경의 의미를 쉽게 받아들이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상식적인 차원에서 성경을 해석한다. 앎의 근원지는 「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역시 상식적인 차원에서 앎의 근원지를 해석한다. 상식은 옳을 때가 있고 옳지 않을 때가 있다.
인간의 「눈」은 얼마든지「눈」구실을 하지 못할 수 있다. 경험론 자들의 말대로 경험대상이 주어지지 않으면 「눈」구실을 할 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눈」에 비쳐지는 것의 성격은 처음 비쳐졌을 때와 나중에 비쳐졌을 때와의 것이 다르다. 처음부터 「눈」에 아버지의 얼굴로 비쳐지는 것이 아니다. 그냥 흩어진 감각 대상으로만 비쳐진다.
그런데 반복적 비쳐짐은 「아버지」의 얼굴을 낳는다. 이 낳게 하는 힘은 「눈」인가, 그「눈」에 비쳐진 「흩어진 감각대상」들을 「묶는 힘」인가. 이 대목이 엄밀한 학을 하려는 사람에게 문제가 된다.
몸 속에 피가 흐르는 방법은 감각대상에 의해서 경험되어짐으로써 후천적으로 개발되는 것이 아니다. 피 흐르는 방법은 타고날 때부터 인간 모두에게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능력이다.
「눈」이「눈」에 비쳐지는 대상을 묶는 능력, 즉 힘 역시 인간 모두에게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능력이다.
우리는 다시 질문을 던질수 있다. 성경은 성경학자만이 읽는 책인가, 보통 사람이 읽는 책인가. 칸트의 경우 칸트 학자만이 읽는 책인가, 보통 사람이 읽는 책인가. 음악가는 음악 책만 읽어야 하는가. 음악가가 철학 책은 읽지 못하는가. 잘못 읽었을 때에는 읽었다고 말할 수 없는가.
세상과의 경험은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지 간에 일단 경험을 했으니까 경험인 것인지 잘못 경험한다고 해서 경험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칸트의 책에 대한 경험의 경우는 어떻게 되는가. 칸트를 잘못 경험했어도 그것이 경험인 것만은 틀림없다. 나는 최근에 칸트의 중요성을 위에서 언급된 사항들과 상관시키면서 다시 경험을 했고, 그 경험이 나에게 소중한 순간을 마련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다시 말하는 것이지만 피 흐르는 방식은 인간이 가지는 선천적 능력이다.
우리가 아버지 얼굴을 아는 방식의 근거를 단순히 수동성 관련 적「눈」의 성질 때문으로 보는가 능동성 관련 적「눈」의 성질, 즉 피 흐르는 방식에 비유되는 대상을 묶는 방식이 능동적으로 인간에게 원래 주어진 것으로 보는가가 문제의 핵이다.
칸트는 수동성 관련 적「눈」없이 인간이 알 수 없는 것은 사실이나 타고날 때부터 인간에게 있는 능동성 관련 적「눈」이 있기 때문에 인간이 어떤 것에 대해서 안다라는 말한 것으로 나에게 이해된다.
물론 철학자가 아닌 나로서 내가 칸트를 옳게 읽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니까 아직도 무엇인지 모르겠는 책이 나에게 있어서 칸트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항상 알고 싶은 책 그리고 읽고 싶은 책, 그것이 바로 음악학을 좀 더 엄밀한 학으로 만들고 싶은 나에게 있어서의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이 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