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서경호 논설위원이 간다

‘나는 중산층’엔 부자도 많아…취약 중산층 지원에 집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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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총선 끝나고 공개된 KDI ‘한국의 중산층’ 보고서

서경호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자료를 찾으러 국책 연구기관들 홈페이지를 들락거리다가 눈에 확 띄는 보고서를 발견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연구보고서 ‘한국의 중산층은 누구인가’였다. 부록과 영문초록까지 포함해 237쪽의 보고서를 쓴 연구자는 황수경 KDI 선임연구위원(전 통계청장)과 이창근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황 전 청장은 문재인 정부의 입맛에 맞지 않은 소득 통계가 나온 뒤 2018년 13개월 만에 전격 경질됐다.

조동철 KDI 원장은 발간사에서 “중산층에 관한 종합 보고서이자 한국 사회의 계층구조 및 정책 갈등의 원천을 이해하는 데도 매우 유익한 보고서”라고 평가했다. KDI 스스로 좋은 보고서라고 하면서도 올해 1월에 발간된 보고서를 최근에야 공개했다. 보고서가 해외 논문사이트(SSRN)와 온라인 교보문고에 오른 것도 며칠 전인 5월 3일이다.

2~3% 제외 소득상위층 상당수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인식

“영향력 강한 엘리트 중산층이
과다대표될 가능성 경계해야”

스스로 계층 평가절하 경우 많아
재분배 목소리 높아질 우려

이 보고서의 새로움을 이해하기 위해선 약간의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중산층은 왜 중요한가. “중산층의 확대는 한국의 모든 역대 정부가 추진해온 주요 정책목표이다. 중산층이 두껍게 형성되는 것은 균형적인 경제성장의 증거이자 동력이며, 아울러 민주주의의 발전과 사회통합의 중요한 토대가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조동철 KDI 원장 발간사)

황수경 전 통계청장의 중산층 연구

문제는 중산층의 범위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온전하지 않다는 점이다. 경제학자들은 보통 측정 가능한 소득이나 소비를 기준으로 중산층을 정의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대표적이다. OECD는 1995년 이후 오랫동안 중위소득의 50~150% 가구를 중산층으로 잡았다가 2019년부터 기준을 75~200%로 상향 조정했다.

〈그래픽 1〉 김영옥 기자

〈그래픽 1〉 김영옥 기자

〈그래픽 2〉 김영옥 기자

〈그래픽 2〉 김영옥 기자

보고서는 우리 사회에서 흔히 제기되는 ‘중산층 위기론’의 근거를 따진다. OECD의 과거·현재 기준 어떤 것을 사용하든 2011~2021년 시장소득 기준으로 본 한국의 중산층 규모는 50%를 약간 웃도는 수준에서 큰 변화 없이 유지됐다. 공적 이전소득과 이전지출을 포함해 실제 가구가 처분할 수 있는 소득(처분가능소득) 기준으로 보면 증가세가 더 뚜렷하다(그래픽 1). 자신을 중간계층으로 인식하는 ‘주관적’ 중산층으로 따져봐도 결과는 비슷하다. 통계청 사회조사에서 자신의 계층을 상·중·하 가운데 중층으로 답한 비율은 1999~2021년 50%대를 유지했다(그래픽 2). 통계청의 최근(2023년) 조사에서는 중산층 인구 비중이 61.6%까지 올라갔다.

객관적·주관적 중산층의 불일치

그럼에도 중산층 위기론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뭘까. 보고서는 소득 등으로 따지는 객관적 중산층과 주관적 중산층의 불일치에서 단초를 찾았다. 객관적 중산층과 주관적 중산층은 대략 비슷한 수치를 보이지만 서로 다른 인구계층을 포착하고 있다. 통계청 사회조사를 뜯어보면 스스로를 상층으로 인식하는 비율은 2~3% 수준에 불과하다. 상위소득계층의 상당수가 자신을 중산층으로 인식하고 있는 거다. 가구소득과 주관적 계층의식을 같이 보면 이런 흐름이 더 뚜렷해진다. 2021년 기준 월평균 소득 700만원 이상인 가구의 구성원 중 단 11.3%만이 자신을 상층으로 인식하고 있고, 76.4%가 자신을 중층으로, 심지어 12.2%는 하층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부자임에도 자신을 중산층으로 여기는 이들이 꽤 된다는 의미다.

〈그래픽 3〉 김영옥 기자

〈그래픽 3〉 김영옥 기자

통계청 가계금융복지조사의 2011~2021년 소득 5분위별 소득점유율 변화 추이를 보면 처분가능소득 기준으로 상위 20%인 5분위의 점유율이 뚜렷하게 감소했다(그래픽 3). 세금·사회보험 등 재분배 효과 때문이다. 객관적으로 경제적 지위가 감소했다고 볼 수 있는 계층은 최상위층인 5분위 그룹뿐이다. 황수경 선임연구위원은 “소득 상위층에 해당하면서도 자신을 중산층으로 인식하는 그룹의 불만이 중산층 위기로 표현되었을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제기한다.

중산층 상당수 “나는 하층”

자신을 낮춰 평가하는 하향 편향은 중산층에서도 발견된다. 사회조사에서 자신을 하층이라고 응답한 비율은 35~40%에 달한다. 중간소득계층으로 파악되는 중산층의 상당수는 자신을 중산층이 아닌 하층으로 인식하고 있는 거다. 상(상상, 상하)·중(중상, 중하)·하(하상, 하하)로 본 한국의 주관적 계층구조는 상상 0.7%, 상하 2.3%, 중상 20.8%, 중하 49.6%, 하상 17.3%, 하하 9.3%였다. 상층은 매우 적고 중간층이 많지만 아래쪽으로 치우친 전형적인 호리병 모습이다.

〈그래픽 4〉 김영옥 기자

〈그래픽 4〉 김영옥 기자

연구진은 중산층을 다양한 경제적 지위를 가진 다층적 집단으로 쪼갰다. 그게 실체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중산층을 ‘사회경제 계층’으로 재구성했다. 지난해 두 차례에 걸쳐 진행한 웹서베이 방식의 패널조사(‘한국인의 계층 인식에 관한 조사’) 결과를 반영했다. 소득 상층에서 자신의 계층 그룹을 낮게 인식하는 그룹을 ‘심리적 비(非)상층’으로, 심리적 비상층을 제외하고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여기는 그룹을 ‘핵심 중산층’으로, 소득 중층에서 자신을 낮게 평가하는 그룹을 ‘취약 중산층’으로 구분했다. KDI의 ‘한국인의 계층 인식에 관한 조사’에선 주관적 계층의식과 소득 기준을 결합한 패널의 계층 구성비를 상층 3.0%, 심리적 비상층 17.8%, 핵심 중상층 54.5%, 취약 중산층 19.9%, 하층 4.9%로 정리했다(그래픽 4).

〈그래픽 5〉 정근영 디자이너

〈그래픽 5〉 정근영 디자이너

◆사회경제 계층 분석=①교육수준별 차이가 뚜렷했다. 학력이 높을수록 상층 비율은 늘지 않고 심리적 비상층 비율만 증가했다. 저학력자의 경우 취약 중산층 비율이 높았다. ②상층이 아닌 심리적 비상층에서 최고소득 직업군인 관리직·전문직 비중이 가장 높았다. 황수경 선임연구위원은 “우리 사회 엘리트층의 상당수가 객관적 소득수준과 무관하게 자신을 중산층으로 여기고 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고 분석했다. 반면에 취약 중산층은 핵심 중산층보다 일반사무직의 비중은 적고 생산·노무직과 판매·서비스직의 비중이 월등히 높았다. ③개인소득 분포는 심리적 비상층에서 700만원 이상인 고소득자 비중이 가장 높았다. 다른 모든 소득 범주를 포함해 체계적으로 상층보다 소득이 높았다. 다만, 10억원 이상의 자산 비중은 상층이 더 높았다. 자산의 상대적 부족 탓에 심리적 비상층이 자신을 중산층으로 여겼을 가능성이 있다. ④주거형태는 심리적 비상층의 자가 비율이 79.3%로 모든 사회경제 계층 가운데 가장 높았다. 핵심 중산층의 자가 비율(70.6%)도 상층(66.8%)보다 높았다. 상층과 심리적 비상층 간에는 자가 보유 여부보다는 어떤 자가를 보유하고 있는지, 어느 지역에서 살고 있는지가 더 중요할 수 있다. ‘강남구 거주자’가 아니라는 것이 자신을 상층이 아닌 중산층으로 판단하는 요인이 됐을 수 있다. ⑤현재의 생활 수준에 대한 만족도에서 취약 중산층은 핵심 중산층보다 하층과 유사했다. 취약 중산층>하층>심리적비상층>핵심 중산층>상층의 순으로 우리 사회의 불평등 정도를 심각하게 인식했다. ⑥확장된 중산층 범주로 보면, 취약 중산층, 심리적 비상층, 핵심 중산층의 순으로 진보적 성향이 강하다(그래픽 5). ⑦심리적 비상층은 능력주의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며, 경제성장이 물가안정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정책적 시사점=고소득층이면서 스스로는 상층이 아니라고 인식하는 심리적 비상층은 고학력자 및 고소득자 비중이 상층보다도 높다. 말 그대로 ‘엘리트’ 중산층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보편적 복지에 대한 수요도 높은 편이다. 심리적 비상층은 생활 수준 만족도 등 여러 측면에서 핵심 중산층보다는 상층에 가깝거나 심지어 상층을 넘어선다. 정부 지원이 크게 필요하지 않은 집단이지만 스스로 중산층으로 여기기에 정책지원을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이들의 사회적 발언권이나 문화 권력은 강력하다. 보고서는 “엘리트 중산층의 견해가 중산층의 사회적 니즈로 과대 포장될 가능성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중산층 지원하려다 상층 못지않은 부자를 나랏돈으로 지원하는 어리석음을 피해야 한다는 지적으로 이해했다.

반면에, 취약 중산층은 외부의 경제적 충격 때문에 언제든지 하층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위기감을 강하게 느끼는 경계 계층이다. 중산층보다는 하층과 더 유사한 특성을 보인다. 하지만 하층을 대상으로 하는 정부의 정책 지원에서는 제외된다. 보고서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 점증하고 있는 취약 중산층의 위험요인(주거 불안, 고용 불안 등)을 경감시키는 데 중산층 정책의 초점을 맞추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바람직하다”고 판단했다. ‘중산층에서 이탈할 위험이 있는 사람들’과 ‘중산층으로 올라가려는 사람들’에 정책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인식하는 중산층 기준이 너무 높은 것도 문제다. 보고서는 “높은 중산층 기준은 현실과 괴리된 기대수준을 형성하고 그러한 허상에 기대어 자신을 평가절하하는 문제로 이어진다”며 “자신의 경제적 지위를 잘못 판단한 결과, 진정한 위치를 알고 있을 때보다 더 높은 수준의 재분배를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중산층에 대한 우리의 오해를 상당 부분 풀어주는 좋은 보고서다. 근데 왜 이렇게 늦게 공개됐을까. 25만원의 전 국민 민생회복지원금을 뿌리자는 야당 못지않게 정부·여당도 선심성 정책을 쏟아냈다. 중산층에 대학 등록금 지원 확대가 대표적이다. 증시 빌드업도 주식 소유 중산층이 좋아할 정책이다. KDI 보고서는 중산층 모두가 정부 지원 대상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