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최현철 논설위원이 간다

"그림 한 점이 세상을 따뜻하게 바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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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최현철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초등학교 600곳에 미술관 기증하는 괴짜 경영학자 

최현철 논설위원

최현철 논설위원

5년 전부터 전국 초등학교에 미술관이 들어서고 있다. 그림 좀 그리는 학생들의 작품이나 유명 화가 작품 카피본이 걸리는 수준이 아니다. 갤러리에서 꽤 높은 가격에 팔리는 전업 작가의 그림들로 채워진다. 교육부의 사업도 아니다. 한 사설 재단에서 추진하는 일이다. 벌써 60곳이 넘었다.

이미 60곳에 들어선 ‘학교 안 작은 미술관’
안동 시내를 가로지르는 낙동강에서 남쪽으로 500m쯤 떨어진 아파트 단지 안에 안동 강남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지난해 49번째 '학교 안 작은 미술관'이 설치된 곳이다. 지난달 17일 오전 이곳을 찾아가는 길에 황의록 한국미술재단(KAF) 이사장이 동행했다. 그는 하루 전 새 미술관 설치 협의를 위해 전북 군산에 출장을 다녀왔지만 “좋은 모습을 꼭 보여주고 싶다”며 먼 길을 마다치 않았다.

안동 강남초등학교에 설치된 학교 안 작은 미술관. 2023년 한국미술재단이 소속작가 그림 18점을 기증해 전시하고 있다. 사진 안동 강남초등학교

안동 강남초등학교에 설치된 학교 안 작은 미술관. 2023년 한국미술재단이 소속작가 그림 18점을 기증해 전시하고 있다. 사진 안동 강남초등학교

중앙 현관에 들어서니 양쪽으로 펼쳐진 복도의 색감과 온도가 달랐다. 왼쪽은 창을 넘어온 밝고 투명한 햇살이 청량했다. 반면 오른쪽 복도에는 창이 없었지만 천정에서 깔끔한 가벽을 향해 쏘아주는 레일 조명으로 은은했다. 30m쯤 되는 복도를 따라 18점의 그림이 전시된 전형적인 갤러리 모습이었다. 조금 다른 게 있다면 아이들이 거리낌 없이 웃고 뛰어다니는 모습 정도. 전시된 작품 중 최수란 화가의 ‘베네치아의 밤’을 가장 좋아한다는 3학년 노해윤 양은 “진짜 화가의 귀한 그림을 쉽게 볼 수 있다는 게 신기하고 실감이 잘 안 난다”고 말했다.

한국미술재단(KAF), 초등학교 10%에 작은 미술관 조성 사업
학교 리모델링 하며 그림 18점씩 기증, 학기마다 순환전시
평가 통과한 소속 작가에 전시 기회, 해마다 해외여행도
다음 사업 구상은 화가들의 그림 보관 고민 해소할 수장고

2020년부터 시작된 '학교 안 작은 미술관' 사업은 지난해까지 강원과 경북에 각 30곳씩 60개 학교에서 완료됐다. 올해 전북의 15개 학교가 선정돼 조만간 공사를 마치고 그림이 걸릴 예정이다. 5년 전 카프 측에서 초등학교에 미술관을 기증하겠다는 아이디어를 냈을 때만 해도 별 호응 없었다. 황 이사장은 “아마 그림 몇 점 주고 생색내려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런데 차례로 설치가 완료되고 입소문을 타면서 이젠 신청 학교가 너무 많아 고민이다.
학교가 장소를 제안하면 황 이사장과 재단 관계자가 직접 내려가 확인한다. 가장 중요한 조건은 아이들이 언제든 볼 수 있는 개방적인 장소여야 한다는 것이다. 설치 장소가 결정되면 가벽과 조명 공사 후 재단 소속 작가 그림을 무진동 차량에 싣고 가 걸게 된다. 긴가민가했던 학교 관계자들은 도착한 그림 수준을 보고 입이 딱 벌어졌다고 한다. 그림값과 공사비까지 학교당 5000만원가량이 들어간다. 이미 30억원 이상 지원한 셈이다.
그림은 학교에 걸리지만, 소유권은 교육청에 넘기고 있다. 교육청 주관으로 학기마다 한 번씩 작품을 순환시키기 위해서다. 이렇게 되면 학교는 관리 부담을 덜고, 학생들은 졸업하기까지 12세트, 200점 이상을 보고 졸업할 수 있게 된다는 구상이다. 그래서 초기엔 학교가 마련한 공간 크기에 맞췄던 기증 그림 수도 18점으로 고정했다.
안동 강남초는 작은 미술관 반대쪽 복도를 학생 미술관으로 만들었다. 이 학교 학생 대부분이 한 점씩 그린 그림에 유약을 바르고 구워 타일처럼 벽을 장식한 것이다. 방과 후 수업에서 그린 작품을 담은 도록도 냈다. 넘겨보니 학생 작품치곤 상당한 수준이었다. 이 학교 이경순 교장은 “미술 교육을 교과서로만 하다 보면 실감이 나지 않는데, 명작을 직접 보면서 아이들도 색감과 구성 등 심미적 수준이 확실히 높아지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 ‘미술 작품 하나로 세상을 따뜻하게’란 재단의 구호가 실제 구현되는 현장을 보며 황 이사장의 얼굴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도대체 이런 일을 왜, 어떻게 하게 된 것일까. 이야기는 역시 한국미술재단, 카프에서 시작한다.

화가 후원자 조합에서 미술재단으로

황의록 한국미술재단 이사장이 4월 11일 오후 서울 서초구 아트버스카프 갤러리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했다. 이날 갤러리에선 재단 소속작가인 김현영 화가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었다. 강정현 기자

황의록 한국미술재단 이사장이 4월 11일 오후 서울 서초구 아트버스카프 갤러리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했다. 이날 갤러리에선 재단 소속작가인 김현영 화가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었다. 강정현 기자

서울 서초구 서울교대 바로 옆 블록 4층짜리 건물 2층에 한국미술재단의 갤러리인 ‘아트버스 카프’가 자리하고 있다. 20평 남짓한 갤러리엔 30점 가량의. 그림이 걸려있고, 전시장 중앙에 큰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다. 365일 무료로 개방하는 이곳에 찾아오는 관람객을 위해 전시 작가나 재단 관계자, 전문 큐레이터가 안내도 하고 간식을 펼쳐 놓고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기자가 찾아간 지난달 11일엔 카프 소속 김현영 화가의 개인전 ‘오늘도 빛*나’가 열리고 있었다.
카프는 ‘소속 작가’라는 독특한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카프의 전신은 한국화가협동조합. 그런데 조합원은 화가가 아니었다. 아주대 경영대학원장을 끝으로 정년퇴직한 정통 경영학자 황의록 교수가 지인들에게 "날릴 셈 치고 딱 3년만 화가들을 돕자"고 설득해 만든 후원자 조직이었다.
그는 IBRD 장학생으로 미국서 학위 따고 돌아와 아주대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창의적 수업과 수많은 기업 컨설팅으로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가난했던 유년시절 동안 문화적 활동을 전혀 할 수 없었던 것이 심리적 위축감으로 오래 남았다고 한다. 소설과 클래식 음악, 그림이 탈출구였다. 특히 미술의 경우 해외 출장을 갈 때마다 시간을 쪼개 유명 미술관과 박물관, 화가의 아틀리에까지 방문했다. ‘패스트 팔로워’ 신세를 막 벗어난 한국 경제가 앞으로 더 나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창의력인데, 그림은 상상력을 키울 수 있는 가장 좋은 소재라는 생각이 굳어졌다.

아주대학교 경영대학원장으로 정년퇴임한 황의록 한국미술재단 이사장은 '그림 한 점이 세상을 따뜻하게 바꿀 수 있다'는 신념으로 2015년 화가협동조합을 창설했다. 이후 조합은 한국미술재단으로 진화했고 엄격한 심사를 통과한 31명의 소속작가들에게 전시 기회를 제공하며 지원하고 있다. 2020년부터는 전국 초등학교의 10%인 600곳에 갤러리를 기증하는 '학교 안 작은 미술관'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은 2019년 중앙선데이와 인터뷰한 황 이사장의 모습. 박종근 기자

아주대학교 경영대학원장으로 정년퇴임한 황의록 한국미술재단 이사장은 '그림 한 점이 세상을 따뜻하게 바꿀 수 있다'는 신념으로 2015년 화가협동조합을 창설했다. 이후 조합은 한국미술재단으로 진화했고 엄격한 심사를 통과한 31명의 소속작가들에게 전시 기회를 제공하며 지원하고 있다. 2020년부터는 전국 초등학교의 10%인 600곳에 갤러리를 기증하는 '학교 안 작은 미술관'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은 2019년 중앙선데이와 인터뷰한 황 이사장의 모습. 박종근 기자

그러다 우연히 국내 화가들과 어울릴 기회가 생겼다. 어쩌다 전시회 개막 전 행사에 초대받아 뒤풀이까지 갔는데, 거기서 가난한 화가 세계의 현실을 목도했다. 몇 차례 밥도 사고, 그림도 사면서 화가 후원자로 소문이 났다고 한다. 내친김에 후원 단체를 만들기로 했다. 그에게 설득당한 수십 명이 3억원을 출자했다. 가난한 화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전시 기회를 갖는 것이다. 조합은 처음부터 이를 목표로 삼았다. 엄격한 기준과 심사를 거쳐 소속 작가를 뽑기 시작했고, 그들에게 무료 전시 기회를 제공해오고 있다. 그리고 2년 뒤 조합원 변동에 따라 출자금을 정산해줘야 하는 불편을 덜고자, 재단법인으로 변신했다.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

카프의 소속 작가 선발은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최소 3년간 4단계의 평가를 통과해야 한다. 우선 블라인드 테스트. 지망하는 작가는 포트폴리오 10장만 내면 된다. 재단은 이름 등 식별 표지는 모두 암호화한 뒤 심사한다. 심사위원도 비공개고 평가도 집에서 한다. 그림만 보고 평가하는 과정에서 심사위원 모두가 동의해야 살아남는다. 그다음은 작업실 점검. 한국에서 계속 작품활동을 하며 발전이 있는지를 본다. 여길 통과하면 ‘등록작가’로 받아주고 함께 작품활동을 하는 모습을 관찰한다. 마지막으로 동료평가를 하게 되는데 여기서 기존 소속 작가 전원이 동의해야 최종 관문을 넘게 된다. 이렇게 해서 한 해 2~3명씩 선발한 소속 작가가 31명(1명 작고)이다.
소속 작가에게는 연 1~2회 아트버스 카프 갤러리 전시 기회가 주어진다. 물론 대관료는 없다. 대신 어디에도 공개하지 않은 미공개작을 걸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다. 전속작가와 달리 소속 작가는 다른 곳에서 전시나 출품하는 데 아무런 제한이 없다. “지원은 하지만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게 재단의 제1원칙이다.

4월 11일 오후 서울 서초구 아트버스카프 갤러리 입구에서 황의록 한국미술재단 이사장이 학교 안 작은 미술관 사업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학교 안 작은 미술관은 2023년까지 강원과 경북 지역 60곳의 초등학교에 설치됐고, 2024년에는 전북 지역 15개 학교에 설치가 진행중이다. 강정현 기자

4월 11일 오후 서울 서초구 아트버스카프 갤러리 입구에서 황의록 한국미술재단 이사장이 학교 안 작은 미술관 사업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학교 안 작은 미술관은 2023년까지 강원과 경북 지역 60곳의 초등학교에 설치됐고, 2024년에는 전북 지역 15개 학교에 설치가 진행중이다. 강정현 기자

연 1회 소속 작가들이 다 함께 해외여행을 다녀온다. 지난해 아프리카에 이어 다음 달 동유럽으로 출발한다. 새로운 사람과 장면, 그리고 색감이 예술혼을 고양하는 기회를 제공하자는 취지다. 경비는 후원금으로 충당한다. 대신 돌아와 작품을 그려 ‘여행전’이란 타이틀로 전시회를 한다. 참여 작가들은 여행 다녀온 대가로 출품한 작품을 기증한다. 이 작품을 어디에 쓸지 고민하다 나온 아이디어가 학교에 기부하는 것이다. 예술가들에게 창작 기회를 주고자 시작한 일이 미래 사회의 주인공들에게 상상력을 키우는 사업으로 이어진 것이다.

미술과 경영이 만나면
'학교 안 작은 미술관' 기증 사업이 본 궤도에 오르면서 그는 또 다른 사업을 기획하고 있다. 수장고 사업이다. 화가들과 대화하다 보면 그림 보관할 곳이 없다는 고민을 토로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는 “열심히 그리는데 당장 팔리지는 않고, 그렇다고 작품을 버릴 수도 없어 끌어안고 있다가 나중엔 작업실에 딱 손바닥만 한 공간만 남고 온통 작품으로 가득 차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이걸 재단이 모아 관리해주는 일을 구상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커피값 정도만 받고 짧은 기간 대여를 해주는 방식도 고려 중이다. “시민들은 적은 부담으로 작품을 향유할 기회를 갖고, 그러다 보면 마음에 드는 그림을 살 수도 있을 것”이라는 전망도 곁들인다. 그 수익을 수장고 운영에 쓰면 일석이조다. 그야말로 경영학자다운 발상이다.

※기사 취재에 심혜주 인턴기자가 참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