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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톱 든 89세, 아마존 원주민…베니스 주인공은 이방인 작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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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브라질 아마존 출신 선주민 화가 6인으로 구성된 마쿠(MAHKU)가 베니스 비엔날레 센트럴 파빌리온의 외벽을 메운 작품 앞에 섰다. 권근영 기자, [사진 국제갤러리]

브라질 아마존 출신 선주민 화가 6인으로 구성된 마쿠(MAHKU)가 베니스 비엔날레 센트럴 파빌리온의 외벽을 메운 작품 앞에 섰다. 권근영 기자, [사진 국제갤러리]

“구석에 처박혀 있을 줄 알았는데(웃음), 많은 사람이 볼 수 있어 다행이에요. 멕시코 광산에서 오닉스 깎을 때 참 힘들었는데, 여기서 다시 보니 반갑네요.”

16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베니스 자르디니 공원 내 베니스 비엔날레 전시장에서 만난 조각가 김윤신(89)은 1980년대 한국의 소나무와 호두나무를 깎아 쌓아 올린 초기작부터 아르헨티나 정착기의 파라이소 나무 조각, 그리고 1991년 멕시코에서 제작한 석조각까지 자신의 작품 8점을 보고 감회에 젖었다. 한국 여성 조각 1세대지만 베니스 비엔날레 참여는 물론, 방문도 이번이 처음이다. “제가 이렇게 촌스러워요. 남의 영향 받지 않고, 좋든 나쁘든 나만의 예술을 세상에 남기고 간다는 생각이었어요.”

한국 여성 조각 1세대인 김윤신(89)의 초기작 8점이 전시돼 있다. 권근영 기자, [사진 국제갤러리]

한국 여성 조각 1세대인 김윤신(89)의 초기작 8점이 전시돼 있다. 권근영 기자, [사진 국제갤러리]

김윤신은 1984년 아르헨티나로 이주, 전기톱으로 나무를 잘라 쌓아 올리며 둘을 합해도 하나가 되고 나눠도 하나가 된다는 ‘합이합일 분이분일(合二合一 分二分一)’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한국에서 ‘잊혀진 작가’였던 그는 지난해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개인전으로 화려하게 컴백했고, 이 전시를 본 베니스 비엔날레 아드리아노 페드로사(58) 감독의 전시 초대를 받았다. 그의 작품은 예술감독의 메시지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센트럴 파빌리온 한복판에 전시됐다. 미국 선주민인 체로키족 화가, 오스트리아·레바논 화가가 자연을 소재로 그린 그림이 함께 걸렸다.

제60회 베니스 비엔날레가 아르세날레와 자르디니 일대에서 개막을 앞두고 미리 공개됐다. 비엔날레는 오는 20일 개막, 11월 24일까지 7개월 남짓 이어진다. 개막일에는 최고의 국가관에 주는 황금사자상, 본전시 참가자 중 젊은 작가에게 주는 은사자상 등의 시상식도 열린다.

이강승의 신작을 들여다보는 관람객들. 권근영 기자, [사진 국제갤러리]

이강승의 신작을 들여다보는 관람객들. 권근영 기자, [사진 국제갤러리]

이번 비엔날레는 ‘외국인은 어디에나 있다(Foreigners Everywhere)’라는 주제로 주변부에서 꾸준히 예술적 실천을 해 온 332명(팀)을 중심부로 불러냈다. 남미 출신으론 처음 베니스 비엔날레 총감독에 선임된 아드리아노 페드로사는 가장 먼저 살았던 땅에서조차 외국인 대접을 받은 선주민, 조국을 떠나 떠도는 디아스포라, 태어나 자란 곳에서 차별받는 성 소수자 등으로 이방인의 개념을 확장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활동하는 이강승(46)의 작품도 센트럴 파빌리온에 전시됐다. 성 소수자의 역사를 드러내는 작업을 이어온 이강승은 AIDS(후천성 면역결핍증) 사망자들을 기억하는 영상과 설치 작품을 내놓았다. 신작 ‘무제(별자리)’는 잊혀지고 지워진 이들을 양피지 그림과 금실 자수로 정성껏 애도한 대규모 설치다.

김윤신 작가가 강원도 양구 작업실에서 전기톱으로 작업하는 모습. [사진 국제갤러리]

김윤신 작가가 강원도 양구 작업실에서 전기톱으로 작업하는 모습. [사진 국제갤러리]

바닥에 깔린 작품을 허리 구부려 들여다보고 사진 찍는 인파 앞에서 만난 이강승은 “비엔날레에서 발언할 기회를 줘서 감사하다. 관객들이 작품에 등장한 이들의 이야기를 궁금해 한다면 내 작업은 역할을 다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선주민·퀴어 등 이른바 이방인 예술가들을 초대한 이번 비엔날레의 핵심은 ‘모두가 이방인이기에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서로를 생각할 수 있다’는 메시지”라고 덧붙였다.

김윤신, 페드로사, 이강승(왼쪽부터 순서대로)

김윤신, 페드로사, 이강승(왼쪽부터 순서대로)

센트럴 파빌리온 외벽은 브라질 아마존 출신 화가 그룹 마쿠(MAHKU)의 벽화로 뒤덮었다. 아르세날레 입구도 뉴질랜드 선주민인 마오리 여성 4명의 창작 그룹인 마타호 컬렉티브의 대규모 섬유 설치가 채웠다. ‘비주류들의 동시대 미술’ 전시 외에 페드로사 감독의 목표는 남반구의 모더니즘을 보여주는 것. 20세기 모더니즘의 역사는 줄곧 유럽과 미국 중심이었다는 비판에서 출발, 지구본을 거꾸로 세우듯 ‘제3세계’로 분류되던 곳들의 ‘서구화’를 보여줬다. 100여 점의 초상화를 내건 전시가 대표적이다. 여기 서구식 복장을 한 채 한복 입은 여성을 그리는 화가를 담은 장우성(1912~2005)의 ‘화실’, 두루마기 차림에 팔레트 든 이쾌대(1913~65)의 ‘푸른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도 포함됐다.

비엔날레도 전쟁의 그림자를 피해갈 수 없었다. 1895년 시작한 베니스 비엔날레는 본전시 외에 국가관별 전시가 특징이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2022년에 이어 참가하지 않았다. 2년 전에는 국가관을 폐쇄했고, 이번에는 별도의 국가관이 없는 볼리비아에 건물을 임대했다. 이스라엘관은 전시를 꾸려둔 채 문을 닫아걸었다. 무장한 이탈리아 군인 세 명이 지키는 가운데 “이스라엘 예술가들과 큐레이터들은 정전 및 인질 석방 합의가 이뤄질 때까지 문 열지 않겠다”는 안내문을 게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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