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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日 재무장관 공동 ‘구두(口頭) 경고’…판세 바뀐 환율 개입의 경제학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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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20 재무장관 회의 참석 차 미국 워싱턴을 방문한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오른쪽)이 16일(현지시간) 세계은행(WB)에서 스즈키 슌이치 일본 재무장관과 만나 악수하고 있다. 기재부 제공

G20 재무장관 회의 참석 차 미국 워싱턴을 방문한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오른쪽)이 16일(현지시간) 세계은행(WB)에서 스즈키 슌이치 일본 재무장관과 만나 악수하고 있다. 기재부 제공

한·일 재무장관이 공동으로 “최근 외환 시장 변동성에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며 ‘구두(口頭) 개입’에 나섰다. 한국과 일본이 손을 잡고 공동으로 강(强)달러와의 ‘환율 전쟁’을 치르는 모양새다.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스즈키 슌이치 일본 재무장관은 16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 세계은행(WB)에서 만나 “최근 양국 통화의 가치 하락(절하)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한다. 급격한 외환 시장 변동에 대응해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한일 외환 당국이 공동으로 구두 개입 메시지를 낸 건 이번이 사상 처음이다. 구두 개입한 시점도 한국 서울 외환시장이 문을 열기 30분 전으로 절묘했다.

한일 재무 수장이 동시에 메시지를 낸 건 처한 상황이 비슷해서다. 한국은 최근 원·달러 환율이 '1400원대', 일본은 엔·달러 환율이 '154엔대'로 각각 위험수위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1400원대 환율을 경험한 시기가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2022년 미국발(發) 고금리 충격 등 3차례뿐인 한국. 엔화 가치가 34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한 일본 모두 달러와 환율 전쟁을 치르고 있다.

자국 통화가치 하락은 수입물가를 끌어올려 물가 불안을 키운다. 중동정세 불안으로 유가가 오르는 상황에서 내수 흐름이 부진한 양국은 동병상련의 입장이다.

같은 시간 미국을 방문한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도 CNBC와 인터뷰에서 "환율 변동이 계속될 경우 시장 안정화 조치에 나설 준비가 돼 있고, 그렇게 할 여력과 방법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기재부 관계자는 “외환시장은 인식 자체가 중요하다”며 “정부가 필요시 어떤 식으로든 적절한 조치를 하겠다는 메시지를 시장에 던지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앞서 16일에도 달러당 원화값이 1400원대에 이르자 기재부와 한국은행이 공동명의로 “외환 당국은 환율 움직임, 외환 수급 등에 대해 각별한 경계감을 갖고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시장은 연이틀 구두 개입과 함께 정부가 달러를 매도하는 식으로 실제 개입도 이뤄진 것으로 본다.

환율은 당국자 발언(구두 개입)에 특히 민감하다. 외환 거래와 관련한 통계를 정부가 가장 먼저, 정확하게 얻기 때문이다. 외화 거래량도 정부 비중이 절대적이다. 정부 발언에 따라 투기 수요가 움직이면 시장을 왜곡할 가능성이 있다. 잦은 구두 개입이 국가 간 환율 분쟁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선진국일수록 정부가 환율과 관련한 언급을 자제하는 이유다.

상황이 다급할 경우 정부가 실제 개입하는 경우도 있다. 백석현 신한은행 이코노미스트는 “외환 당국의 시장 개입은 ‘누구나 알지만, 하고도 안 한 척’ 쉬쉬하는 게 불문율”이라며 “다만 위기 상황에서 시장 실패를 막기 위해 (시장 개입이) 최소한에 그쳐야 한다는 것이 글로벌 스탠더드”라고 말했다.

최근 몇 년 새 정부의 환율 개입을 둘러싼 국제 기류가 다소 바뀌었다. 세계 각국이 외환 시장에 말로, 혹은 직접 개입하는 경우가 과거에 비해 잦아졌지만 미국은 환율 조작으로 문제 삼지 않는 모양새다.

일본은 2022년 달러당 엔화값이 150엔에 이르자 연일 구두 개입했다. 결국 한 달간 25조5000억원 규모 달러를 팔아 엔화를 사들이는 식으로 직접 개입했다. 사후에야 미국과 사전 합의한 사실을 밝혔다. 당시 1400원대 환율을 기록한 한국도 연일 구두 개입하다 3분기 동안 일본과 비슷한 규모의 달러를 매도했다.

하지만 미국 재무부는 “강달러에 따른 한일 정부의 시장 개입”이라며 용인했다. 국제통화기금(IMF)과 국제결제은행(BIS) 같은 국제기구도 자본 유출 등 환율 충격이 발생했을 때 정부가 외환시장에 개입하는 것을 정책 수단으로 공식 인정하자는 논의가 활발하다. 외환시장 개입을 근거로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해 불이익을 준 미국 재무부의 기존 논지와 엇갈린다.

환율 개입의 무역 수지 개선 효과가 예전만 못한 것도 기류가 달라진 배경이다. 자국 통화 가치를 절하할 경우 수출이 늘어나고, 무역수지가 차츰 개선되는 경향이 알파벳 J자를 비스듬히 눕힌 모습과 비슷하다고 뜻의 ‘J 커브’ 효과가 작동하지 않으면서다.

정영식 대외경제정책연구원 국제거시금융실장은 “원화 가치가 떨어져도 수출은 크게 늘지 않는데, 수입 물가를 끌어올 리는 효과는 과거보다 크게 나타난다”며 “국제 교역에서 달러로 거래하는 비중이 크게 늘고 글로벌 공급망이 고도화하면서 환율 급등락이 교역에 미치는 영향이 줄었다”고 설명했다.

기본적으로 환율은 시장이 결정한다. 하지만 IMF 외환위기 트라우마를 겪은 데다 수출 주도 경제 구조인 한국은 ‘환율 주권’에 특히 민감하다. 17일(현지시간) 워싱턴 DC에서 처음 열리는 한·미·일 3국 재무장관회의에서 한미 통화스와프를 맺을지 주목된다. 양국은 2008~2010년, 2020~2021년 두 차례에 걸쳐 통화스와프를 맺은 뒤 종료했다. 일본과는 지난해 12월 100억 달러 규모 통화스와프를 체결했다. 통화스와프는 두 나라가 정한 환율로 자국 통화를 일정 시점에 교환하는 계약이다. 시장 불안을 사전에 막아 ‘외환 안전판’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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