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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의 분노 이용한 트럼프, 민주주의만 악화시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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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마이클 샌델 교수가 지난 5일 미국 하버드대 톰슨홀에서 ‘민주주의의 위기’를 주제로 인터뷰하는 모습. [사진 김선욱 교수]

마이클 샌델 교수가 지난 5일 미국 하버드대 톰슨홀에서 ‘민주주의의 위기’를 주제로 인터뷰하는 모습. [사진 김선욱 교수]

“민주주의가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시민이 삶을 스스로 결정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해야 하고, 정치인은 다양한 의견을 취합해 정책으로 만들어내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는 지난 5일(현지시간) 미국 매사추세츠주 하버드대 톰슨홀에서 김선욱 숭실대 철학과 교수와 만나 이렇게 이야기했다. 김 교수는 『정의란 무엇인가』를 비롯해 샌델의 최신작 『당신이 모르는 민주주의』(2023)까지 국내에 출간된 샌델의 모든 저서를 감수하고 해제를 쓴 철학자다. 이 자리에서 샌델은 “능력주의를 맹신하는 사회에서 승자는 성공을 자기 노력의 결과로만 여기고 패자는 실패를 자신의 탓으로 돌린다. 승자는 오만해지고 패자는 굴욕을 당연시하게 된다”며 “이런 분위기가 양극화를 부추기고 대중의 분노를 키운다”고 말했다. 다음은 인터뷰 주요 내용. 김 교수가 묻고, 샌델이 답했다.

마이클 샌델 교수(왼쪽)가 김선욱 교수와 지난 5일 미국 하버드대 톰슨홀에서 만나 ‘민주주의의 위기’를 주제로 인터뷰하는 모습. [사진 김선욱 교수]

마이클 샌델 교수(왼쪽)가 김선욱 교수와 지난 5일 미국 하버드대 톰슨홀에서 만나 ‘민주주의의 위기’를 주제로 인터뷰하는 모습. [사진 김선욱 교수]

“능력주의 맹신, 양극화·불평등 심화시켜”

『당신이 모르는 민주주의』는 어떤 내용을 담고 있나.
“오늘날 정치는 숙고는 빠진 채 절차의 공정성만 중요시하거나 양극화된 정치적 입장을 가진 정치인들의 말싸움 자리로 변질됐다. 그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지난 수십년 간 우리를 지배한 능력주의 문화다. 그 결과 경제적 양극화와 불평등을 마주하게 됐다. 이 때문에 민주주의는 크게 약화됐고, 민주적 제도는 위기에 빠졌다. 책에서 이런 현상의 원인과 해결책을 다뤘다.”
현대 사회에서 능력이 강조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능력주의를 비판하는 것과 능력을 무시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승자가 능력을 갖추고 성공한 것은 자기 노력 덕으로만 돌릴 수 없는, 많은 도움과 행운이 함께한 결과다. 감사함을 잃어버리고 오만에 빠지는 게 문제다. 승자의 겸손이 양극화를 해결하는데 반드시 필요하다. 패자도 실패가 자신의 탓만이 아니라는 걸 알아야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다.”
이것은 ‘자유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철학적 문제와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참된 자유란 무엇인가.
“우리는 선택의 자유와 자기의 이익을 추구할 자유를 가진다면 자유로운 존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미국의 전통에서는 시민적 공화주의 자유 개념이 더 지배적이었다. 시민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도록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때 자유롭다는 것이다. 자유는 자치와 직결된다. 미국이 추구한 민주주의가 본래 이런 것이다.”
이런 의미의 민주주의는 무엇이 다른가.
“시민들은 공공의 사안에 대해 함께 숙고하고 공동선을 추구하게 된다. 타운홀 미팅이 그런 사례다. 모두 평등한 주체로서 그런 역할을 잘 감당하는 것이 시민의 덕목이다. 정치에서 시민의 토론과 대화, 공동선에 대한 고민이 중요한 요소다. 이것이 민주주의를 살리는 길이다.”
오늘날 정치문화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시민들은 지금 무력감에 빠져있다. 자신의 목소리가 정치인에게 들려지지 않고 중요시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시민적 공화주의 자유 개념이 제도와 실천 모두에서 회복돼야 한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미국 대선에 다시 출마해 강한 지지를 얻고 있는데, 이 현상을 어떻게 보나.
“트럼프는 능력주의의 결과인 대중의 분노를 잘 포착하고 이를 이용하는데 탁월했다. 지난 수십년 간 깊어진 빈부 격차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의 엄청난 분노 감정을 잘 이용했다. 트럼프가 그들에게 귀를 기울인 것은 잘했지만, 그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았고 민주주의를 악화시켰을 뿐이다.”
대중의 분노의 배경에 정치 엘리트들의 역할이 있다는 얘기인데, 전문가들이 주요 정책 결정을 주도하는 건 전문성이 강조되는 현실에 부합하지 않나.
“정부에 전문가가 있고 전문성을 잘 활용해야 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정치인은 전문가만을 따라가면 안된다. 예를 들어 팬데믹 때문에 언제 학교 문을 열고 닫을지의 결정은 공동선을 염두에 두고 내려야 하는 정치적 결정이다. 보건 전문가의 자문이 필수이지만, 그 결정을 전문가가 내려야 한다는 것은 기술관료제의 환상이다. 여기에서 필요한 것은 정치인의 책임있는 판단력이다.”

“정치인, 전문가 의견만 따라가선 안 돼”

정치인의 역할이나 자질은 무엇일까.
“정치인은 시민들, 특히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의 말을 공감을 갖고 경청해야 한다. 전문가의 정확한 정보와 분석을 활용하고 대중의 말을 경청하고, 공동선을 토대로 상황을 잘 고려해서 판단하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실천적 지혜와 한나 아렌트가 말한 정치적 판단력이 바로 그것이다.”
요즘 대학에서 인문학은 능력주의 경쟁에서 소외되고 있는데, 이 시대 인문학의 역할은 무엇인가.
“교수로 활동하면서 많은 사람이 철학적 고민을 통해 삶이 변화되는 모습을 봤다. 특히 대학은 모든 학생에게 인문학을 가르쳐야 한다. 인문학적 사유를 갖도록 문학·철학·사학 등을 반드시 접하게 하는 건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하다.”
특별히 관심을 갖는 주제나 저술 계획이 있나.
“급격히 발전하는 기술 문제에 관심이 있다. 인공지능(AI)의 등장과 챗GPT와 관련한 윤리적 의미, 빅데이터 시대의 프라이버시 문제, 소셜미디어가 개인을 고립시키는 현상 등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왜곡된 정보의 유통, 정치적 편향성을 강화하는 미디어의 역할도 큰 문제다. 이런 문제를 책으로도 쓸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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