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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기협의 남양사(南洋史) <7>

빅터 리버먼 '기묘한 평행선'이 기묘한 길로 빠진 이유

중앙일보

입력

김기협 역사학자
김기협 역사학자

김기협 역사학자

지역사의 범위를 정하는 데는 두 가지 기준이 적용된다. 지금의 세계구조 안에서 그 지역이 하나의 큰 단위를 이루느냐 하는 것이 한 기준이고, 과거의 역사 속에서 그 지역이 하나의 뚜렷한 흐름을 보여주느냐 하는 것이 또 한 기준이다.

역사의 연속성을 전제로 할 때는 두 기준이 겹쳐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상당히 어긋날 수도 있다. 과거의 역사 속에서도 겹쳐지는 단계와 벗어나는 단계가 엇갈릴 수 있고, 같은 시점에서도 겹쳐지는 측면과 어긋나는 측면이 엇갈릴 수 있다.

남양, 즉 동남아를 역사의 한 무대로 설정하는 데도 이론의 여지가 있다. 무엇보다도, 대륙부와 해양부 사이에는 자연조건에 전반적 차이가 있고 그 차이가 역사 전개 과정을 서로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간 측면이 작지 않다. 이 차이를 어떻게 볼 것인가 검토해 본다.

리버먼이 찾는 세계사의 ‘평행선’

남양사의 기존 연구를 가장 잘 정리한 책으로 앤서니 리드의 〈통상(通商)시대의 동남아시아〉(2책, 1988, 1993)를 제시한 바 있다. 그보다 더 늦게 나오고 분량도 더 많고 학계의 평판도 더 높은 책이 있다. 빅터 리버먼의 〈기묘한 평행선: 세계사 속의 동남아시아 Strange Parallels: Southeast Asia in Global Context, c. 800-1830〉(2책, 2003, 2009)다.

Victor Lieberman, Strange Parallels: Southeast Asia in Global Context, c. 800-1830 (2 vols., 2003, 2009)

Victor Lieberman, Strange Parallels: Southeast Asia in Global Context, c. 800-1830 (2 vols., 2003, 2009)

내게는 리드의 책이 참고가치가 더 크다. 두 책 다 1년 전에 입수했으나 리버먼의 책은 아직 일부만(1/3쯤?) 읽었다. 남양사 집필을 끝낼 때까지도 다 읽어볼 것 같지 않다. 책 읽기를 평생의 업으로 삼아온 내가 진행 중인 작업의 중요한 참고자료를 이렇게 소홀히 한다는 것은 참 ‘기묘한’ 일이다. 왜 그런지 생각해 본다.

제일 큰 이유는 리버먼의 책에 동남아에 관한 내용이 적다는 데 있다. 같은 두 권이지만 리드 책의 갑절이 넘는 분량인데(1500쪽 가까움) 내용의 절반은 다른 지역 이야기다. 그것도 중국과 인도처럼 동남아와 직접 관계가 많은 지역보다 러시아, 일본, 프랑스 등 동떨어진 지역 이야기가 많다. 그리고 남은 절반 가운데도 다시 절반은 동남아 사정을 그 지역들과 비교하는 내용이다.

다른 지역 이야기가 많은 것은 “기묘한 평행선”을 찾는 데 몰두하기 때문이다. 역사 공부에서 뜻밖의 관련성을 찾아내는 것은 각별한 즐거움이다. 하지만 그런 즐거움은 짤막한 에세이로 보여주는 것이 좋다. 새로운 고찰의 실마리를 제공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두툼한 책은 ‘기묘한’ 느낌이 사라질 만큼 정리된 뒤에 나와야 할 것이다.

지역사로서 남양사 서술은 초기 단계다. 이 단계에서 다른 지역과의 관계는 남양사를 파고들어가는 데 중요한 실마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관계’가 아니라 ‘평행선’을 찾는 것은 남양사의 윤곽이 더 분명해진 뒤에나 바람직한 작업이 될 것이다.

국가조직을 고찰의 중심에 두는 리버먼

리버먼이 이 책에서 말하는 “동남아”는 실제로 대륙부만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는 대륙부와 해양부를 “보호구역(protected zone)”과 “노출구역(exposed zone)”의 차이로 가른다. 대륙부는 유라시아대륙의 다른 세력과 접촉이 작아 내적 요인에 의해 역사가 진행된 반면 해양부는 15세기 이후 외부 세력들 사이의 교역로가 되어 외적 요인에 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는 “기묘한 평행선”을 동남아(대륙부), 프랑스, 일본, 러시아 등 전혀 무관해 보이는 지역들 사이의 비교에서 찾는데, 모두 보호구역에 속한다는 공통점 때문에 평행선이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내륙아시아(유목민)와의 접촉이 적었다는 것이 보호구역에 속하는 이유다. (러시아를 보호구역으로 보는 것은 이 기준으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흥미로운 발상이다. 그러나 조금 생각해보면 일관성이 없어 보인다. 유목민과의 접촉을 보호와 노출의 기준으로 삼다가 유독 동남아 해양부의 경우에만 해양세력을 기준으로 삼기 때문이다. 대항해시대 이후 유럽세력의 진격 앞에는 노출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 노출이 얼마간 늦고 빠른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보호구역과 노출구역의 구분이 1권 집필을 끝낸 뒤에 떠오른 생각이라고 리버먼은 2권 머리말에서 밝혔다. 오랫동안 숙고해 온 주제가 아니라 작업 진행 중에 부분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떠올린 임시방편이라는 느낌이 든다.

문명의 발생과 발전을 위한 지정학적 조건은 많은 연구자들이 생각해 온 주제다. 교통이 편리한 곳의 문명 발전이 빠르다는 것은 상식이 되어 있다. 그런데 교통이 편리하다는 것이 리버먼에게는 노출구역의 조건 아닌가? 외부세력과 접촉이 많다는 데 위협의 측면만이 아니라 발전을 위한 자극의 측면도 생각해야 한다. 리버먼이 국가조직을 고찰의 중심에 두기 때문에 위협의 측면을 더 크게 보는 것 같다.

‘비교사’의 가치를 살리기 위해서는

교섭사를 중심으로 공부를 해 온 내게는 리버먼의 서술 방향이 사실 입맛에 맞는다. ‘평행선’을 찾다 보면 ‘접점’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리버먼이 안내만 잘해준다면 프랑스사든 일본사든 얼마든지 따라다닐 마음이다.

그런데 중국사에 관한 언급을 보면서 따라다닐 마음이 사라졌다. 2권 500쪽에 5호16국-남북조시대를 요약한 대목이 있다.

“중국에서는 이 시기(제1차 분열기)에 이런 특징들이 나타났다; 영토의 분열, 중앙권력 쇠퇴와 귀족 특권의 강화, 준-노예 노동력을 발판으로 한 장원(莊園)의 발달, 통화와 재정의 위축, 도교와 새로 수입된 대승불교의 융성과 유학의 쇠퇴, 내륙아시아 종족들의 침략과 북방 지배, (북방에서) 이주한 귀족세력의 남방 지배, 북방과 남방 사이의 문화적-사회적 격차 확대.”

대다수 연구자들이 동의하는 특징적 현상들이다. 그러나 논의가 완결된 주제들이 아니다. 하나하나 현상의 함의를 밝히기 위한 노력이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예를 들어 “내륙아시아 종족들의 침략과 북방 지배”를 놓고 보면, 과연 이 정복자들이 아주 이질적 존재였는지, 어느 정도 중국문명에 동화된 존재였는지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이민족 정복”의 실질적 의미는 이런 논의를 통해 밝혀질 것이다.

그런데 리버먼은 대표적 통설의 내용을 나열하는 데 그친다. (책을 다 읽지 않았으나 중국에 관한 서술은 먼저 찾아 읽었다.) 이런 정도 피상적 서술이라면 프랑스사나 일본사의 이해를 도와줄 것도 기대하기 어렵다. 그래서 읽을 흥이 나지 않는 것이다.

리드의 책이 더 재미있는 이유

리버먼이 십여 년 앞서 나온 리드의 책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서론에 리드의 학설을 검토하는 한 절을 두었다.(1권 15-21쪽) 이것을 읽으면 두 사람의 관점 차이를 쉽게 알아볼 수 있다. (물론 리버먼 입장에서 쓴 글이지만 동남아 역사의 윤곽을 파악한 독자는 “바담 풍”도 “바람 풍”으로 알아들을 수 있다.)

앤서니 리드(좌, 1939~ )와 빅터 리버먼(우, 1945~ ). 뉴질랜드 출신으로 오스트레일리아와 싱가포르에서 주로 활동한 리드는 미시건대학의 리버먼에 비해 변방의 역사학자인 셈이다. 두 사람의 관점 차이도 이 위치의 차이에 기인하는 면이 있는 것 같다.

앤서니 리드(좌, 1939~ )와 빅터 리버먼(우, 1945~ ). 뉴질랜드 출신으로 오스트레일리아와 싱가포르에서 주로 활동한 리드는 미시건대학의 리버먼에 비해 변방의 역사학자인 셈이다. 두 사람의 관점 차이도 이 위치의 차이에 기인하는 면이 있는 것 같다.

동남아 역사의 주체성을 경시하던 초기 서양 학자들의 제1기(외인론), 독립 이후 지역 학자들이 각국의 자주성을 너무 강조하던 제2기(자주론)를 넘어 지역 전체를 조망하는 동남아 역사 연구의 제3기를 리드 한 사람이 열었다고 높이 평가한다. 그리고 제3기를 넘어 자신이 제4기를 여는 것이라고 더 높이 평가한다.

리드는 외인론으로 회귀했고 자신은 자주론의 차원을 높여 (전 세계적 시각을 세움으로써) 이를 다시 극복하는 것이라고 리버먼은 자평한다. 리드가 교역의 발전을 동남아 역사의 주축으로 보는 반면 자신은 지역의 정치조직 발전을 중심에 둔다는 것이다.

내게 리드의 책이 더 재미있는 이유가 이 차이에 있다. 동남아 역사 연구는 아직 윤곽을 잡는 단계다. 거시적 시각이 중요한 단계다. 자주성으로 균형을 잡는 것은 윤곽이 어느 정도 잡힌 뒤에 가능한 일이다. 너무 서두르다 보니 “기묘한 평행선” 같은 기묘한 길로 빠진다. “묘수 세 번 쓰면 바둑 진다”고 하지 않는가. 역사의 이해는 상식적인 길로 가는 편이 낫다.

수마트라섬 연구자인 리드가 해양부와 교역을 중시하고 미얀마 연구자인 리버먼이 대륙부와 국가조직을 중시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특정 지역에 연고가 없는 내가 남양사에 끌리는 것은 그곳의 국가 경험에 특이한 면이 있기 때문이다. 국가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는 데는 리드의 관점에서 배울 것이 많다.

리버먼이 대륙부와 해양부의 차이를 크게 보는 것은 국가조직을 기준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교역을 기준으로 볼 때는 그 차이가 줄어든다. 물론 대륙부와 해양부 사이에는 자연조건의 상당한 차이가 있고 그 차이가 역사의 진행 과정에도 비쳐질 것이다. 그러나 공유하는 조건도 많았다. ‘남양’을 외부와 대비되는 하나의 영역으로 충분히 고찰한 뒤에 대륙부와 해양부 사이의 차이는 부차적으로 살펴볼 만한 주제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