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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기협의 남양사(南洋史) <8>

베트남, 한국과 닮았다…'남중화' 내세운 그들의 열망

중앙일보

입력

김기협 역사학자
김기협 역사학자

김기협 역사학자

남양에서 중국의 영향을 제일 폭넓게 받은 곳이 베트남이다. 남양의 대부분 지역이 중국과 느슨한 조공관계 외에는 민간 활동을 통해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과 달리 베트남은 중국 왕조의 직접지배를 받은 기간이 길었다. 10세기의 독립 이후에도 한국과 함께 중국의 가장 중요한 조공국이었다.

베트남과 한국은 한자문명과 유교문화를 전면적으로 받아들인 위에 중국식 관료제 왕조국가를 세웠다. 응우옌(阮) 왕조가 중원의 중화와 대등한 ‘남(南)중화’를 표방한 것은 만주족이 중원을 석권한 상황에서 조선이 ‘소(小)중화’를 자임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심리였다.

베트남 역사의 이해를 위해 한국 역사와의 비교를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 좋다. 거대한 이웃과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가느냐 하는 것이 양쪽 모두에게 중요한 과제였기 때문이다.

홍방 왕국과 단군조선

한국 역사에서 고조선과 비슷한 위치에 베트남 역사에는 홍방(鴻龐) 왕국이 있다. 기원전 2879년의 일로 전해지는 이 왕국의 개국 설화에는 단군신화와 비교해 볼 점들이 있다. 환웅과 비슷한 위치에 신농씨(神農氏)의 현손이라는 데민(帝明)이 있고, 그 아들 록뚝(祿續)이 왕조를 열었다고 한다.

동손(Dong Son) 청동북은 홍방 시대에 나타난 것이다.

동손(Dong Son) 청동북은 홍방 시대에 나타난 것이다.

홍방은 기원전 257년에 멸망하고 아우락(甌貉) 왕국이 그 뒤를 이었다. 아우락의 시조 툭판(蜀泮)이 촉(蜀) 왕자였다고 하는 사서의 기록을 보더라도 이 왕국의 주도세력은 중국 방면에서 온 것으로 생각된다. 아우락은 기원전 179년에 남월(南越)에 병탄되고, 남월은 기원전 111년에 한나라의 정벌로 멸망했다. 중국 방면의 세력이 주도한 아우락과 남월은 고조선을 이어받은 위만조선을 연상시킨다.

홍방 왕국의 존재가 1479년에 나온 〈대월사기전서(大越史記全書)〉에 처음 나타난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앤서니 리드와 눙투옛짠이 함께 엮은 〈베트남-국경 없는 역사 Viet Nam: Borderless Histories〉(2006)에 실린 유인선의 논문 “레반후와 응오시리엔: 베트남 역사에 대한 두 역사가의 관점 비교”에는 〈대월사기전서〉가 1272년에 나온 〈대월사기(大越史記)〉와 비교돼 있다. 레반후의 〈대월사기〉 서술은 조타(趙佗)의 남월 개국(기원전 204)에서 시작하는데, 200년 후 응오시리엔의 〈대월사기전서〉는 홍방 왕국에서 시작한다.

Nhung Tuet Tran and Anthony Reid, eds., Borderless Histories. “국경 없는 역사”라는 제목은 국가와 민족의 제약으로부터 역사관을 해방시키자는 뜻이다.

Nhung Tuet Tran and Anthony Reid, eds., Borderless Histories. “국경 없는 역사”라는 제목은 국가와 민족의 제약으로부터 역사관을 해방시키자는 뜻이다.

유인선은 이 차이를 13세기 후반과 15세기 후반 베트남 지배층의 사상 조류를 배경으로 설명한다. 몽골제국이 중국을 석권한 13세기에는 중국과 대등한 ‘제국’을 자임하며 그 지역에서 처음 황제를 칭한 남월을 그 역사의 시점으로 삼았고, 명나라 점령기(1407~1427)를 극복한 후 응오시리엔의 시대에는 베트남의 독립성에 대한 자신감이 홍방 왕조의 서술로 표현됐다는 것이다.

단군조선이 12세기 중엽의 〈삼국사기〉에 보이지 않다가 13세기 말의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 나타나는 사정과 비교하는 마음이 든다. 김부식의 시대에는 중국의 분열 상황에서 동국(東國)의 독자성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고, 일연의 시대에는 몽골의 위협 앞에서 깊은 뿌리를 내세우려는 열망이 나타난 것과 비슷한 시대적 차이가 베트남에도 있었던 것이다.

베트남-중국 전통의 양면성

베트남 역사는 통상 한무제 정벌(기원전 111) 이전의 상고시대, 그로부터 938년까지 계속된 중국 지배시대, 그리고 938~1862년의 왕조시대로 통상 구분된다. 중국 지배시대에는 베트남의 실질적 독립성이 늘어날 때도 있고, 줄어들 때도 있지만 교주(交州·베트남 북부)를 중국 영토로 보는 관점이 지속됐다. 당나라 멸망 후 중화제국의 통제력이 약화하면서 독립국으로서 베트남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중국 지배시대에 베트남과 중국 사이의 실제 관계는 어떤 것이었을까? 〈대월사기〉와 〈대월사기전서〉 사이 차이점의 예로 유인선이 제시하는 시니엡(士燮·137~226)의 모습에서 상당한 시사점을 찾을 수 있다.

시니엡 집안은 신나라(新·9~23) 때 전란을 피해 교주로 옮겨온 이주민 문벌이었다. 시니엡이 초년에 효렴(孝廉)을 통해 한나라 조정에 출사한 것은 지방 실력자의 자제를 숙위(宿衛)시키던 한나라 정책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한나라가 혼란에 빠져들자 출신 지역의 군벌이 돼 조조(曹操)가 장악하고 있던 한나라와 손권(孫權)의 동오(東吳)에서 장군과 태수 등 직함을 받았다.

〈대월사기〉가 시니엡의 유연한 대중국 관계를 통한 베트남 영토 보전을 칭송한 서술과 〈대월사기전서〉가 문학과 예악 등 중국 문명의 적극 도입을 찬양한 서술 사이의 차이를 유인선은 지적한다. 두 사서가 작성된 시점에서 베트남 지도층의 사상 경향이 보여주는 차이다.

중국 문명의 베트남 전파에서 매개자로서 시니엡의 역할이 가진 양면성을 이 차이에서 읽을 수 있다. 중원이 혼란에 빠질 때 시니엡 집안은 자기 지역(교주)이 혼란에 휩쓸리지 않도록 지키는 데 전념했다. 중화제국 안에 남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그에게 부차적인 문제였을 것이다. 베트남의 독립은 그 후 역사의 흐름에 따라 정해졌거니와, 시니엡과 같은 매개자들은 그와 관계없이 베트남의 문명 발전에 공헌한 것이다.

근대 이전의 역사가들만이 아니라 오늘의 베트남 역사가들도 중국과의 관계와 중국의 영향에 대해 비슷한 양면성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베트남의 문명 발전에 공헌한 측면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베트남의 독립에 위협이 된 측면이 있다.

베트남 역사의 대세 ‘남띠엔’

중국과 인접한 위치에서 중국 문명을 폭넓게 수용한 공통점 때문에 베트남과 한국의 역사를 비교해 볼 만한 측면들이 있다. 그러나 공통점도 있지만 차이점도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한국과 달리 베트남은 다민족 국가라는 사실에 있다.

역사 속의 ‘베트남’은 지금 베트남의 북쪽 1/3 영역이다. 그 영역에도 소수민족이 많지만 베트남 국가 구조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11세기 이후 ‘남띠엔(南進)’을 통해 통합한 중부와 남부의 영역이다.

베트남 ‘남띠엔’ 지도. 중부 지역은 15세기까지 편입됐고 남부 지역의 편입은 19세기까지 계속됐다.

베트남 ‘남띠엔’ 지도. 중부 지역은 15세기까지 편입됐고 남부 지역의 편입은 19세기까지 계속됐다.

베트남 중-남부에는 참파가 있었다. 중국 기록에 참파를 가리키는 점성(占城) 외에 림읍(林邑)과 부남(扶南)이 보이는데, 림읍은 참파의 한 부분이거나 참파에 통합된 세력으로 보이고, 부남은 캄보디아 쪽에 중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4세기 동남아 대륙부 국가들의 영역.

14세기 동남아 대륙부 국가들의 영역.

키논 부근에 남아 있는 참파 유적. 가장 높은 탑은 39미터에 달한다.

키논 부근에 남아 있는 참파 유적. 가장 높은 탑은 39미터에 달한다.

다낭의 힌두교 사원에 남아 있는 10세기 조각.

다낭의 힌두교 사원에 남아 있는 10세기 조각.

참파는 192년 림읍의 독립(한나라로부터) 이후 1832년 베트남의 정복이 완성될 때까지 국가 형태를 지속했는데, 그 통합성에는 의문이 있다. 대부분의 기간에는 문화적 특성을 공유하는 여러 집단이 느슨한 연대를 맺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파의 후예인 참족이 쓰는 참어는 남양어족(Austronesian Language Family)에 속한다. (말레이반도를 제외하고) 대륙부에서 가장 큰 남양어 사용 집단이다. 시바 신앙이 성행했고, 15세기께부터 이슬람이 지배계층에 널리 퍼졌다. 해양활동이 왕성해 중국과 남양 다른 지역을 연결하는 교역에 큰 역할을 맡았다.

오랜 기간에 걸친 남띠엔을 통해 참파 지역이 베트남에 흡수되는 과정은 많이 밝혀져 있지 않다. 지금까지 참어와 참 문화를 지키며 ‘참족’으로 인식되는 집단은 참파의 후예 중 일부분에 불과하다. 참파의 후예 대부분은 ‘베트남인’이 돼 있다.

참파를 합쳐 완성된 ‘새로운 베트남’  

높은 산맥과 바다로 동서가 가로막힌 베트남에는 북쪽의 중국과 남쪽의 참파가 가장 중요한 이웃이었다. 중국에 압박을 받으면서 참파에 압박을 가하는 것이 베트남 역사의 대세로서 ‘남띠엔’으로 나타났다.

19세기 중엽 이후 치열한 대외항쟁 속에 민족의 단결을 외치는 베트남 민족주의는 남띠엔의 실제 의미를 외면해 왔다. 찰스 휠러는 〈베트남-국경 없는 역사〉에 실린 논문 “하나의 지역, 두 개의 역사”를 이런 말로 시작한다. “어느 지점에선가 베트남 역사가 딱 끝나고 그 다음에 참파 역사가 시작된다.” 베트남 역사와 참파 역사의 연구가 서로 관계없이 진행돼 온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다.

휠러는 베트남 중부의 항구도시 호이안(會安) 일대의 지역사를 통해 참파 역사와 베트남 역사가 뒤얽힌 모습을 보여준다. 호이안 지역은 1471년 베트남으로 넘어갔고 1558년 응우옌 왕조의 시조 응우옌호앙(阮潢·1525~1613)이 남부를 장악한 후 그 중요한 거점이 됐다. 이 무렵 명나라가 일본과 직접교역을 거부하면서 중계무역항으로서 호이안의 역할이 커져 남양 일대에서 가장 중요한 무역항의 하나가 됐다.

호이안의 명소 추아카우(塔橋, Chua Cau)는 16세기 말 일본인 상인들이 만든 것으로 “일본 다리”로 흔히 불린다. 16-17세기에 중국과 일본 사이 교역의 태반이 호이안을 거쳐 이뤄졌고 호이안 도시의 절반이 일본인 구역이었다고 한다.

호이안의 명소 추아카우(塔橋, Chua Cau)는 16세기 말 일본인 상인들이 만든 것으로 “일본 다리”로 흔히 불린다. 16-17세기에 중국과 일본 사이 교역의 태반이 호이안을 거쳐 이뤄졌고 호이안 도시의 절반이 일본인 구역이었다고 한다.

1750년께 프랑스인이 그린 호이안 풍경.

1750년께 프랑스인이 그린 호이안 풍경.

호이안 부두의 등불축제.

호이안 부두의 등불축제.

무역항의 번성을 위해서는 많은 인적·물적 자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휠러는 지적한다. 사서의 기록대로 1471년 이후 참파인이 이 지역에서 사라졌다면 호이안의 번영을 뒷받침할 자원도 없었을 것이라며, 호이안 지역에서 참파의 전통에 베트남 요소들이 가미돼 ‘새로운 베트남’의 정체성이 형성됐다는 관점을 제시한다.

베트남과 참파 사이는 긴 세월에 걸쳐 중국풍 문화와 인도풍 문화의 경계선이었다. 베트남과 참파의 통합 과정에서 일어난 현상을 살펴보면 두 계통 문화가 어울리는 양상을 이해할 길을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