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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포퓰리즘과 분노 정치 시대의 총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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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사전투표가 지난 금요일과 토요일에 이뤄졌다. 수요일에 본투표가 남아 있으니 총선은 현재진행형이다. 선거 과정을 돌아보면 두 흐름이 내 시선을 끈다.

첫째는 ‘포퓰리즘 정치’다. 20세기형 포퓰리즘이 복지정책을 앞세운 인기영합주의 정치였다면, 21세기형 포퓰리즘은 ‘적과 동지의 이분법’으로 무장한 비(非)자유주의 정치다. 비자유주의 포퓰리즘은 나와 이념을 같이 하는 이들만 ‘진정한 국민’으로 여긴다. 다른 정치 세력 및 지지자들에 대한 혐오와 악마화가 포퓰리즘의 최대 무기다. 포퓰리즘 아래서 진영 정치는 한층 요새화하고 있다.

총선의 두 흐름은 포퓰리즘과 분노
이틀 후 새로운 정치지형 마주해야
좋든 싫든 국민 선택받은 국회의원
책임감 발휘하고 포용 정치 일구길

둘째는 ‘분노의 정치’다. 분노의 정치의 다른 이름은 ‘정체성 정치’다. 정체성 정치란 이념·민족·젠더 등 자신의 정체성을 이루는 것들이 부정되는 현실에 분노하고 저항하는 정치를 말한다. 우리 사회의 경우 진보적 시민은 보수적 정부가 국민으로서 누려야 할 존엄성을 부정하는 것에, 보수적 시민은 진보적 세력이 보수가 일궈온 대한민국 가치를 부정하는 것에 분노하고 있다.

이 정체성 정치는 팬덤 정치의 얼굴로도 나타난다. ‘우리’라는 집단적 정체성은 온라인 초연결을 통해 자신과 같은 팬들과 동료애·목적의식을 공유하게 한다. 팬덤 정치는 정치 과정에 직접 참여한다는 만족감을 안겨준다. 그러나 동시에 리더에의 비이성적 충성심은 합리적 대화와 토론을 거부하게 한다. 요새화된 진영 정치는 팬덤 정치 아래서 다시 한번 힘을 얻는다.

전통적 민주주의의 시각에서 보면 한국 민주주의는 위기 국면으로 들어서고 있다.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이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주장했듯, 민주주의는 이제 투표장에서 전복되는 것처럼 보인다. 정치사회의 공간이 포퓰리즘 정치와 진영 정치로, 시민사회의 공간이 분노의 정치와 팬덤 정치로 대체되는 것은 우리 민주주의 위기의 현실이자 증거다.

정녕 난감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 민주주의의 미래가 이렇게 비관적인데 이틀 후에는 새로운 정치 지형과 마주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좋든 싫든 지역구 의원과 비례대표 의원 모두 국민의 선택을 받은 정치인이라는 사실이다. 현실적 관점에서 이들이 정치인으로서의 책무를 다해줄 것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 한국 정치를 공부하는 이로서 두 가지를 미리 당부하고 싶다.

첫째, 직업정치인으로서의 책임감이다. 막스 베버는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정치의 치명적인 두 죄악으로 ‘객관성의 결여’와 ‘무책임성’을 들고 있다. 정치를 직업으로 삼은 이라면 객관적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무책임하게 입법을 추진할 경우 그것이 국민 다수에게 불행을 안겨준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정치인에게는 옳고 그름의 ‘신념윤리’ 못지않게 정치적 행위의 결과까지 책임지는 ‘책임윤리’가 중요하다.

직업정치인에게 부여된 책임의식을 베버는 다각도에서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정치인에게 필요한 자질은 ‘열정·책임감·균형감각’의 세 가지다. 정치적 대표성에 헌신하는 태도가 열정이라면, 그 대표성에 책임을 다하는 태도가 책임감이다. 그리고 이 열정과 책임감 사이의 균형감각이 요구된다. 균형감각은 사물과 사람에 거리를 두는 태도이자 주어진 현실을 수용하는 역량이다.

둘째, 대한민국의 미래에 대한 숙고다. 현재 우리 사회가 서 있는 자리는 어디일까. 저성장·초저출생·초고령화·복합위험·신냉전질서 앞에 놓여 있다. ‘두려운 미래’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현재가 정점이라는 불안이 전 세대와 전 계층에 스며들어 있다. ‘피크 코리아’다. 문제의 핵심은 정치가 이러한 대한민국의 전진을 가로막는다는 데 있다. ‘정치의 죽음’이다. 이러한 현실에 보수와 진보 모두 면책되지 않을 것이다.

성숙한 경제·문화 선진국으로 자리 잡는 길은 결코 쉽지 않다. 그것은 역작 『좁은 회랑』에서 대런 애쓰모글루와 제임스 로빈슨이 개념화한 ‘좁은 회랑’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서는 오만한 정부와 분별없는 시민사회 간의 거리가 멀어져 왔다. 양극화와 비타협이 시대의 질서가 돼가고 있다. ‘포용적 경제’를 일구지 않고서는, 이 포용적 경제를 가능하게 하는 설득과 타협의 ‘포용적 정치’를 통해 국가와 사회 간의 생산적 균형을 추구하는 좁은 회랑으로 들어가지 않고서는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 ‘문제는 정치다!’라는 주장은 이 포퓰리즘과 분노의 정치 시대에 가장 중요하고 유효한 테제다.

사전투표율이 총선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정치가 아무리 실망을 안겨주더라도 우리 국민은 이 애증하는 정치에 대한 관심이 여전히 높다고 봐야 한다. 김수영의 ‘사랑의 변주곡’을 소환하고 싶다. “가시밭, 덩쿨장미의 기나긴 가시가지까지도 사랑이다.” 분노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걸까. 그렇다고 믿고 싶다. 우리 정치가 객관성과 책임감을 바탕으로 번영의 좁은 회랑으로 국가와 사회를 이끌어주길 나는 소망한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