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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촌 장관 "삶의 의미 묻는 순수예술, 예산지원 대폭 늘린다"[인간다움을 묻다④]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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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파우스트' '리어왕' '홀스또메르' 등의 작품을 예로 들며, "고전과 인문학에서 인간다움을 이해하기 위한 단초를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김현동 기자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파우스트' '리어왕' '홀스또메르' 등의 작품을 예로 들며, "고전과 인문학에서 인간다움을 이해하기 위한 단초를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김현동 기자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기 마련이다."
지난달 25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만난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인간다움을 이해하기 위한 단초로, 『파우스트』(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한 구절을 들었다. 수십년 간 연극 무대에 서왔던 문화예술인다운 인용구였다.
연극 '파우스트'에서 고뇌하는 인간 파우스트와 그를 파멸로 유혹하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를 모두 연기했던 그는 "방황의 진정한 의미는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라며 "방황하지 않는다는 건 자기 삶에 대한 고민과 성찰이 없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인간은 늘 고민하고 방황하며 성장한다"며 "인간다움을 찾아가는 길에 고전과 인문학이 유용한 나침반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유 장관은 요즘 시대에도 여전히 울림을 줄 만한 또 다른 고전으로 톨스토이 원작의 연극 '홀스또메르'를 들었다. 1997년 국내 초연 이후 그가 꾸준히 무대에 올리고 있는 작품이다. 출연 횟수가 '햄릿' 보다 더 많다. 한때 촉망받는 경주마였던 늙고 병든 말이 과거를 회상하는 내용의 연극으로, 말의 입을 빌려 인간들의 그릇된 욕망과 모순, 어리석음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이 작품에 그가 유독 애착을 갖는 이유는 무엇일까.

'홀스또메르'의 어떤 면에 매료됐나.  
"인생의 거울 같은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교과서적인 훌륭한 연극이다. 얼룩말이란 이유로 조롱받던 말이 공작의 눈에 띄어 경주마로 화려한 삶을 누리지만 다리를 다친 뒤 천대받다가 도살되는 스토리는 우리 인생사의 한 모습이기도 하다. 초연 때 공연이 끝났는데도 관객들이 자리를 뜨지 못하더라.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질문이 가슴을 먹먹하게 했기 때문이다."
수백년 전 고전의 메시지가 지금에도 여전히 유효한 이유는 무엇일까.  
"고전 속 인간들의 행태가 지금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리어왕'을 보면 휠체어에 의지해 자식들 싸움을 보게 되는 말년의 재벌 기업가가 생각나지 않나. ‘파우스트’ 한 편에 세상이 다 있다. ‘홀스또메르’도 아무리 화려하게 살던 귀족도 죽으면 똑같이 흙으로 돌아간다는 결말을 통해 삶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그게 고전의 힘이자 문화의 존재 가치다."
2022년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공연한 연극 '햄릿'에서 햄릿의 비정한 숙부 클로디어스를 연기한 배우 유인촌. [사진 신시컴퍼니]

2022년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공연한 연극 '햄릿'에서 햄릿의 비정한 숙부 클로디어스를 연기한 배우 유인촌. [사진 신시컴퍼니]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란 질문은 인류의 영원한 숙제인 것 같다.  
"인간관계의 단절, 고립·소외 현상이 심화되면서 인간 존재 자체와 관계 맺기에 대한 고민이 '인간다움'이란 거시적 논의로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인공지능(AI)의 발전 속에서 '무엇이 인간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지고 있다. 인간성에 대한 도전이 계속되는 지금이야말로 인간다움의 가치를 되새겨보고, 문화의 역할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해야 한다고 본다." 
저출산·고령화, 청소년·노인 자살률 증가 등의 문제가 심각하다. 문화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문화예술이 가진 치유 효과와 회복력에 주목해야 한다. '홀스또메르'를 본 관객이 내게 편지를 보내온 적이 있다. IMF 외환위기로 사업이 망해 자살까지 생각했는데, 연극을 본 뒤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결심했다는 내용이었다. 잘 만든 연극 한 편이 위로와 감동을 넘어 생명을 구하기까지 한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비행 청소년들에게 연극을 가르치고, 함께 자전거 여행을 다녀본 적이 있는데 재범률이 크게 감소하는 걸 피부로 느꼈다."
디지털 과몰입, 우울감에 빠진 청년층에게 인문학 접근성을 높여줘야 하지 않나.    
"삶의 만족도 하락, 혐오 확산, 세대 갈등 등 청소년 문제가 심각하다. 청년 고립·은둔 문제도 마찬가지다. 사후 대책보다는 문화적 처방을 통해 예방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학교 뿐 아니라 문화시설, 청소년 시설 등에서 독서·글쓰기·인문캠프 등 다양한 문화예술 체험과 인문적 경험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이를 통해 삶의 의미와 목표를 깨닫게 한다면 젊은 층의 정서적 문제 해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본다."
인문가치 확산과 관련한 계획이 있다면.  
"'인문정신문화축제'를 올 가을에 개최할 예정이다. 인문학과 인문정신의 중요성과 가치를 널리 알리고 공유하는 행사다. 개별적으로 해왔던 다양한 인문·문화 사업들을 한데 모아 축제 형식으로 규모있게 하겠다는 것이다. 인문·문학·출판 분야의 다양한 주체들이 참여한다. 우리의 사상과 역사, 문화를 깊이 있게 가르치는 인문고전 프로그램도 구상하고 있다."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모든 콘텐트의 원천적 소재가 되는 순수예술 분야에 대한 예산지원을 내년에 대폭 늘릴 계획"이라고 밝혔다. 김현동 기자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모든 콘텐트의 원천적 소재가 되는 순수예술 분야에 대한 예산지원을 내년에 대폭 늘릴 계획"이라고 밝혔다. 김현동 기자

신구·박근형·박정자 배우가 출연한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가 전석 매진 행렬을 이어가고 있다.  
"지방 공연도 자리를 구하기 힘들다던데, 꽤 의미있는 일이다. 끊임없이 허상을 기다리는 바보 같은 인간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인데, 관객은 이 연극을 보며 자기를 돌아보게 돼 있다. 캐스팅과 기획 덕도 있지만, '나는 누구이며 어디로 가고 있나' 라는 인간의 철학적 갈망을 제대로 건드려줬다고 본다. 순수예술 만이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다."  
순수예술 분야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있다.  
"글로벌 인기를 누리는 대중문화에 비해 순수예술 쪽은 너무 뒤쳐져 있다. 투자 또한 마찬가지다. 인문학을 바탕으로 하고,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는 거울 역할을 하는 게 순수예술이다. 파생되는 부가가치도 상당하다. 웹툰이나 영상콘텐트도 소설, 시 등에서 소재를 찾고 모방도 하면서 같이 발전한다. 가장 원천적인 소재는 문학·미술·음악·연극·무용 등 순수예술에 있다. 내년에는 순수예술에 대한 예산 지원을 대폭 늘릴 생각이다. 그래야 대중문화도 융성해지고, 전반적인 문화역량이 튼튼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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