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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수영 교수 "분노하는 한국인, 서로 밀쳐내는 고슴도치 같다"[인간다움을 묻다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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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담 권위자인 권수영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 상담코칭학과 교수를 지난 6일 연세대 상담코칭센터에서 만났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상담 권위자인 권수영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 상담코칭학과 교수를 지난 6일 연세대 상담코칭센터에서 만났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지난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2022년 ‘보다 나은 삶 지수’(Better Life Index‧BLI)에서 한국은 사회적 연결 지표가 41개국 중 38위였다. 생활‧교육 수준은 높았지만, ‘도움이 필요할 때 의지할 사람이 있다’고 응답한 사람은 80%로 OECD 평균 91%를 크게 밑돌았다.
효(孝)와 예(禮)를 중시하며 공동체적 가치를 중시해온 우리가 어쩌다 관계 지표에서 세계 최하위 수준으로 추락한 걸까. 지난 6일 서울 연희동 연세대학교에서 만난 ‘관계 전문가’ 권수영(57)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상담코칭학과 교수는 “한국인은 원래 관계를 중시하는 민족인데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등을 통해 관계가 양적으로 팽창한 반면, 질적으로는 무너졌다”면서 그 요인으로 공동체 문화 붕괴, 사회적 기준에 지나치게 엄격한 '빡빡한 문화'(Tight Culture)를 들었다.
한국상담진흥협회 이사장 등을 역임한 그는 저서 『치유하는 인간』, 『나쁜 감정에 흔들릴 때 읽는 책』 등과 tvN ‘어쩌다 어른’ 등 강연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인의 분노에 감춰진 진짜 감정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메시지를 내왔다.

권수영 연세대 상담코칭학과 교수 #"한국인 분노 '고슴도치 딜레마'… #빡빡한 사회·마을 문화 붕괴 탓"

마을 문화 붕괴하며, 정신건강도 무너졌다 

그는 한국의 관계망 붕괴는 코로나19 이전부터 나타났다고 봤다. “마을 문화가 사라진 게 상징적이다. 공동체 붕괴는 정신 건강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면서 ‘인성교육진흥법’이 제정된 2015년을 주목했다.
권 교수는 “당시 층간소음 때문에 이웃에게 칼부림을 하는 등 사회갈등과 분노범죄 수위가 높아졌다. 공교육이 학교폭력을 막을 수 없어서 인성교육을 의무화했다”면서 최근의 분노 현상을 독일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우화 ‘고슴도치 딜레마’에 빗댔다.
“한국은 집단주의 문화다. 남에게 보이는 게 중요하고 자신의 존재감을 타인을 통해 느끼다 보니, 소외감·거절감도 강하다”면서 “서로의 가시에 찔려 점점 경계하고 밀어내는 고슴도치처럼, 서로 상처받지 않으려고 이념‧성별‧세대별로 끼리끼리 나뉘면서 관계의 질이 떨어지고 소외감이 커졌다”고 설명했다.

권 교수는 "한국인의 관계가 질적으로 무너졌다. 휴대폰에 저장된 번호는 수백개여도 가까이 속마음을 털어놓을 상대는 줄고 있다"면서 "SNS로 관계를 맺으며 '연결됐다'고 착각하지만, 멋지게 가공된 타인의 모습으로 인해 오히려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린다"고 지적했다. 사진 셔터스톡

권 교수는 "한국인의 관계가 질적으로 무너졌다. 휴대폰에 저장된 번호는 수백개여도 가까이 속마음을 털어놓을 상대는 줄고 있다"면서 "SNS로 관계를 맺으며 '연결됐다'고 착각하지만, 멋지게 가공된 타인의 모습으로 인해 오히려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린다"고 지적했다. 사진 셔터스톡

권 교수는 이즈음 SNS에 유행한 ‘혼밥족’ 인증샷을 예로 들었다. “대학가에서 같이 밥 먹을 사람이 없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화장실 변기 칸에서 혼자 밥 먹는 ‘셀카’를 찍어 올린 게 시작”이라면서 “고통까지 연대하고 싶어할 만큼, 소외되는 걸 두려워한다. 심하게는 ‘버려졌다’, ‘쓸모없는 인간’, ‘쓰레기’라고 자학한다”고 했다. 또 “스스로에 대한 모멸감이 클수록 타인에 대해 폭력을 행사하거나 자해할 가능성이 커진다”고 경고했다.

남 눈치 보는 '빡빡한 문화' 바꾸려면 

늘어나는 고독사도 사회적 관계망이 붕괴된 사례다. 권 교수는 “50대 고독사가 70~80대보다 많은 것은 사회 기준에 맞춰 살다가 퇴직 후 가정‧사회에서 설 자리를 못 찾고 고립되는 경우가 많아서”라고 말했다. 그는 또 “사회의 기준에 맞추지 못하면 존재 가치를 잃는다고 느끼는 '빡빡한 문화' 순위에서 한국은 65개국 중 모로코‧인도네시아‧이집트 등 이슬람 국가들에 이어 9위를 차지했다”고 지적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가장 최근 발표한 '2022 더 나은 삶 지수(Better Life Index)'에서 한국은 생활, 교육 수준은 높은 반면, 사회적 연결 지표(Community)가 41개국 중 38위였다. 사진 OECD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가장 최근 발표한 '2022 더 나은 삶 지수(Better Life Index)'에서 한국은 생활, 교육 수준은 높은 반면, 사회적 연결 지표(Community)가 41개국 중 38위였다. 사진 OECD

해법은 없을까.   

“빡빡한 문화를 바꾸려면 인문학적 사고가 중요하다. 인문학의 기본은 내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아는 것이다. 남이 가르쳐준 해답을 벗어나 나만의 고유 가치를 발견해야 한다.”

어떻게 나를 돌아볼까.  

“오늘 얼마나 즐거웠는지, 어려울 때 누가 옆에 있다고 느꼈는지 돌아보면 된다. 기성세대는 늘 감정이 뒷전이었다. 요즘 20~30대는 자신의 감정을 소중히 여기고 자신을 돌아보려는 욕구가 있다. 가족‧친구와 더 공감할 수 있다면 사회적 연결 지표도 올라갈 것이다.”

가족 간 세대 장벽도 높은데.

“관계도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 아이가 독립된 자아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섣불리 침범하면 방어 벽만 높아진다. 대신 ‘힘들 때 원하면 대화 상대가 될 준비가 돼 있다’는 메시지를 줘야 한다.”

부모 세대도 소통이 어렵다.

“지금 50~60대가 부모에 효도한 마지막 세대라잖나. 대접받길 원할수록 실망할 가능성이 크다. 그동안 남을 위해 살았다면 나이 들수록 나 자신을 성숙하게 가꾸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정부 '마을 중심' 인문학 정책 의미 커 

권수영 교수가 연세대 상담코칭센터 입구에서 활짝 웃었다. 그는 "나를 돌아보는 것"을 인문학적 공동체 문화 회복의 첫 걸음으로 봤다. 권혁재 기자

권수영 교수가 연세대 상담코칭센터 입구에서 활짝 웃었다. 그는 "나를 돌아보는 것"을 인문학적 공동체 문화 회복의 첫 걸음으로 봤다. 권혁재 기자

권 교수는 그런 점에서 정부의 인문학 정책이 의미 있다고 봤다. 외로움 상담센터, 인문 프로젝트 지원, 생활속 인문강좌 확대 등이다. 지난해 12월 문체부‧지역문화진흥원이 개최한 ‘2023 연결사회 포럼’에선 서울 방학동 50세 이상 주민들의 서로 돌봄 공동체 ‘방학서클’의 실천 사례, 고립‧은둔 청년을 위한 지원사업 사례 등도 소개됐다.
권 교수는 “인문진흥 운동을 마을 중심으로 하는 게 좋다”면서 스웨덴 스톡홀름의 사립 대안학교 '프리슈셋(Fryshuset)'을 모범 사례로 꼽았다. 프리슈셋은 지역사회 자원을 활용해 ‘학교 밖 청소년’을 다양한 교육‧문화‧복지 서비스로 품은 마을 프로젝트다.
그는 또 세월호·이태원 참사 등 잇따른 재난 상황 또한 사회 관계망을 통한 치유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사회 관계망이 잘 구축되면, 재난 생존자가 비슷한 고통을 받은 사람에게 힘을 주고 함께 치유할 수 있게 되는 ‘외상 후 성장’도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인간다움을 묻다'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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