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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원 스토킹'의 비극…"못 참겠다" 공무원 신상정보 지운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항의성 민원에 시달리다 숨진 김포시 9급 공무원 A(39)씨는 생전 인터넷 카페 등에 실명이 유출됐다. 지난달 7일 김포시청 앞에 마련된 A씨의 빈소. 김포시 제공

항의성 민원에 시달리다 숨진 김포시 9급 공무원 A(39)씨는 생전 인터넷 카페 등에 실명이 유출됐다. 지난달 7일 김포시청 앞에 마련된 A씨의 빈소. 김포시 제공

공무원 사진과 이름 등이 담긴 조직도가 서울과 부산 일부 구청 종합민원실과 홈페이지에서 사라졌다. 악성 민원인에 신상정보가 유출된 김포시 공무원이 지난달 5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의 여파로 소속 공무원들이 신상정보 삭제 요구에 나서면서다. 다른 주요 광역단체들도 공무원노조 요구로 신상정보 비공개 문제에 관한 협의 절차에 들어갔다.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서울‧부산지부는 "각 시청‧구청과 공무원 신상정보 비공개를 협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특히 서울지부는 "공무원 사진 삭제와 이름 익명화뿐만 아니라 반복 민원을 막기 위한 민원 쿼터제, 민원 처리 결과지에 기재된 담당 공무원 이름 삭제 등도 요구했다"고 말했다. 인천과 경기지부도 준비를 마치는 대로 시‧도청과 협의에 나설 예정이다. 그간 전국의 시·도청 등 지방자치단체들은 책임 행정을 위해 종합민원실과 홈페이지 등에 조직도와 함께 업무별 담당 공무원 사진과 이름을 공개해왔다.

서울 양천구청은 지난 28일부터 종합민원실 배치도 등에 게재된 담당 공무원 사진을 삭제하기 시작했다. 악성민원에 시달리는 공무원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 중 한다. 박종서 기자

서울 양천구청은 지난 28일부터 종합민원실 배치도 등에 게재된 담당 공무원 사진을 삭제하기 시작했다. 악성민원에 시달리는 공무원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 중 한다. 박종서 기자

공무원들이 신상정보 삭제에 나선 배경에는 정부가 수년 전부터 제기된 악성 민원 문제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다는 불만이 있다. 지난해 8월 공무원노조가 실시한 ‘공무원 악성 민원 실태조사’ 결과, 응답자 7061명 중 84%(5933명)가 “최근 5년 사이 악성 민원을 받아본 경험이 있다”고 답변했다. 특히 도로 포트홀 문제로 악성 민원에 시달리고, 인터넷 카페 등에 실명 등이 공개된 1년 6개월 차 9급 공무원 A씨 사망이 기폭제가 됐다.

서울의 한 공무원 노조 관계자는 “김포 공무원 사건 이후 직원 보호를 위해 개인 신상정보 공개를 막아달라는 요청이 수없이 들어왔다”며 “카페 등에서 좌표가 찍혀 피해를 봤다는 사례, 조직도 사진을 보고 스토킹 피해를 봤다는 사례 등이 접수됐다”고 말했다. 한 공무원은 “민원 처리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른 기관에도 민원을 제기했다”며 “동일 민원 총 300여개를 접수한 적이 있다. 정상 업무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김포 공무원 사건 이후 부산 해운대구는 지난달 21일 구청 등에 게재된 좌석배치표에서 담당직원 사진을 지우고, 홈페이지에 표시된 담당자 이름도 익명화됐다. 해운대구청 홈페이지 캡처

김포 공무원 사건 이후 부산 해운대구는 지난달 21일 구청 등에 게재된 좌석배치표에서 담당직원 사진을 지우고, 홈페이지에 표시된 담당자 이름도 익명화됐다. 해운대구청 홈페이지 캡처

김포 공무원 사건 이후 신상정보 삭제에 나선 자치단체도 있다. 부산 해운대구다. 해운대구는 지난달 21일 구청 등에 게재된 좌석 배치표에서 담당 직원 사진을 지우고, 홈페이지에 표시된 담당자 이름도 익명화했다. 예산편성, 지방교부세, 조정교부금 담당 기획조정실 '김OO'처럼 표시하는 방식이다. 서울에선 양천·동작·서대문구가 지난 28일부터 배치도에 담당 공무원 사진 삭제 작업에 나서고 있다. 양천구 소속 공무원은 “사진 하나 지운다고 악성 민원을 모두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신상 털리기는 막을 수 있어 안심된다”고 말했다.

공무원 신상정보 삭제는 악성 민원 해결의 임시방편이다. 미국에선 악성 민원이 심한 국세청, 복지부에 방문하기 위해선 신원 확인 절차를 가진다. 영국은 욕설, 구체적 근거 제시 거부, 다른 기관에 반복 민원 제기하는 자를 고질 민원인으로 규정해 담당 공무원을 만날 시간과 방법 등을 제한한다.

정부는 이번 주 공무원노조 등과 악성 민원 문제 해결을 위한 협의에 나서고, 이달 중에는 악성 민원 종합대책을 발표한다. 김동원 인천대 행정학과 교수(한국인사행정학회장)는 “보안시스템 등을 마련해 악성 민원인으로부터 공무원을 지킬 필요가 있다”며 “악성 민원에 대응할 수 있는 매뉴얼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해준 공무원노조 위원장은 “악성 민원에 고발할 수 있는 의무 조항을 신설하고, 악성 민원 대응팀을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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