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글로벌 아이

시에스타 논쟁 뜨거운 스페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3면

안착히 글로벌협력팀장

안착히 글로벌협력팀장

“식당들이 새벽 1시까지 영업하는 나라는 합리적이지 않다. 영업시간을 계속 늘리는 일은 미친 짓이다.”

최근 스페인을 발칵 뒤집어 놓은 욜란다 디아즈 부총리 겸 노동·사회경제부 장관의 말이다. 밤 10시에도 저녁 식사가 한창인 생활습관을 고수하는 나라에서 좌파 장관이 의회에서 던진 발언은 도발로 받아들여졌다. 우파 정치인들은 즉각 “디아즈 장관은 우리 모두 일찍 집으로 돌아가 등불 아래서 차를 마시며 공산당 선언을 읽기 바라는 것이다”라고 받아쳤다. 업계도 반발했다. 식당 영업시간을 1시간 줄이자는 제안이 엉뚱하게도 이념 논쟁으로 번진 상황이다.

스페인 남부 도시 론다의 식당. 관광객들이 식사를 즐기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스페인 남부 도시 론다의 식당. 관광객들이 식사를 즐기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스페인은 유럽 국가 중 일과가 가장 늦게까지 이어지는 나라다. 그 이유는 태양이 절정인 오후 2시에서 일을 멈추고 열기가 조금 누그러지는 5시에 재개하는 ‘시에스타(siesta)’ 관습 때문이다. 이 시간, 식당과 상점은 문을 닫고 길거리는 한산해진다. 농경 사회일 때 시에스타는 고단한 일을 잠시 내려놓고 낮잠을 자면서 재충전하는 시간이었다. 2016년 한 조사에 따르면 아직도 이 생활 습관을 그대로 지키는 스페인 사람은 약 18%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한낮의 브레이크 타임(break time)은 스페인에서는 관행으로 굳어져 있다.

시에스타 이후 오후 8시까지 이어지는 영업, 이에 따라 늦어지는 저녁 식사, 식사 후 술 한 두 잔 마시며 즐기는 ‘소브레메사’(sobremesa: 식후 식탁에 남아 대화를 즐기는 시간)까지. 식당들이 문을 일찍 닫을 수 없는 조건들이다. 이미 껑충 뛰어버린 종업원 인건비, 이들의 늦은 퇴근 및 귀가로 발생하는 심야 교통비, 그리고 야근으로 생기는 각종 육체적·정신적 건강 문제를 생각한다면 식당 영업시간을 줄이자는 디아즈 장관의 주장은 일리가 없지 않아 보인다.

스페인 노동계는 노동시간을 현행 40시간에서 37.5시간으로 줄여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장시간 일할수록 생산성이 떨어진다는 연구결과를 내세우면서 지난 수년간 스페인만의 특수한 노동 시간에 관한 논쟁을 벌이고 있다. 시에스타가 이런 노동시간 축소 논의에 걸림돌로 작용하는 모양새다.

인식과 생활습관은 무섭다. 하루아침에 바꾸기 힘들기 때문이다. 일종의 문화가 되어버린 생활 관습을 대상으로 하는 논쟁은 예민한 측면이 있다. 스페인의 생산성 제고와 노동시간 단축 과제가 그들의 전통과 맞서며 어떤 변화를 이루어낼지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