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막내가 상사에게 "10억원 달라"…'다우니의 어머니' 탄생 썰 [비크닉]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b.피셜

잘 만들어진 브랜드는 특유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어요. 흔히 브랜드 정체성, 페르소나, 철학이라고 말하는 것들이죠. 그렇다면 이런 브랜드의 세계를 창조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이들은 어떻게 이토록 매혹적인 세계를 만들고, 설득할 수 있을까요. 비크닉이 브랜드라는 최고의 상품을 만들어내는 무대 뒤편의 기획자들을 만납니다. 브랜드의 핵심 관계자가 전하는 ‘오피셜 스토리’에서 반짝이는 영감을 발견하시길 바랍니다

모든 시장에는 판을 바꾸는 '게임 체인저'가 있다. 반도체·조선 같은 빅 마켓부터 소소한 소비재 시장까지 문법을 새로 쓰는 이들이다. 한국 P&G의 이지영(46) 대표도 그 중 하나다. 2012년 섬유유연제 '다우니'의 국내 출시를 총괄하며, 딱 6년 만에 카테고리 점유율 1위로 만들었다. 비농축 섬유유연제가 대부분이었던 당시, 약 3분의 1컵만 사용해도 7일간 지속되는 향을 강점으로 내세우면서다. 이후 국내 섬유유연제 시장의 대세는 '초고농축'으로 달라졌다.

200명의 소비자들을 가가호호 방문해서 만났어요. 세탁 과정을 직접 보니, 한국 사람들이 유난히 섬유유연제의 향, 그것도 잔향에 집착한다는 것을 알게 됐죠. 독한 향은 안 되고, 갓 빨래한 듯 상쾌한 향이 오래 가야 한다는 어려운 주문을 하더라고요.

지난 14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중앙일보에서 이지영 한국 P&G 대표를 인터뷰했다. 사진 홍성철

지난 14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중앙일보에서 이지영 한국 P&G 대표를 인터뷰했다. 사진 홍성철

그때의 성공으로 이 대표는 ‘다우니의 어머니’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그 역시 “한국 섬유유연제 시장 진출을 앞두고 제품 콘셉트를 못 잡고 있던 프로젝트를 맡아 성과를 냈고, 스스로도 가장 성장했던 시기”라고 말했다.

‘어쩌다 성공’이라 하기에 이 대표의 이력은 단단하다. 2000년 한국 P&G 마케팅 브랜드 매니저로 입사,  일본·싱가포르·중국 등 P&G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여러 요직을 거치며 20년 이상 마케팅 경험을 쌓았다. 하나씩 계단을 올라 22년 차였던 만 44세에 ‘한국인 최연소 대표’ 자리에 올랐다.

그야말로 알파 피메일(Alpha Female)의 전형이라 할 만한 그의 내공은 어디서 생겨났을까. 지난 14일 서울 상암동 중앙일보에서 그를 만났다. 다우니· 페브리즈 등으로 국내 섬유탈취 시장을 장악할 수 있었던 비결, P&G에서의 커리어 등 지난 일의 여정에 관해 물었다.

한국인이라 차출된 9년 차 직원

Let’s go find out!(나가서 조사해 봅시다!)

다우니·페브리즈·질레트·오랄비·팬틴 등 유수의 브랜드를 보유한 세계 굴지 소비재 기업 P&G에서 제품 출시 전 금과옥조로 여기는 한 가지 원칙이다. 바로 시장 조사. 지금이야 마케팅에 앞서 소비자 데이터를 확보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1920년대 P&G에 ‘시장 조사’라는 부서가 처음 생기기 전까지는 생소한 과정이었다. 

이 대표가 한국 섬유유연제 시장 진출이라는 큰 프로젝트에 합류한 배경도 여기에 있었다. 2008년부터 싱가포르 P&G의 아태지역 홈케어 팀에서 마케팅 디렉터로 일하고 있었던 이 대표에게 “한국 시장을 잘 아는 한국인이니 한번 해봐라”라는 주문이 떨어진 것이다. 

초고농축, 오래가는 향기라는 새로운 키워드로 지난 2012년 한국에 상륙한 다우니는 섬유유연제 시장의 게임 체인저가 됐다. 사진 한국 P&G

초고농축, 오래가는 향기라는 새로운 키워드로 지난 2012년 한국에 상륙한 다우니는 섬유유연제 시장의 게임 체인저가 됐다. 사진 한국 P&G

좌초될 뻔한 다우니 출시 프로젝트를 맡았다.
한 브랜드가 세상에 태어나려면 정말 많은 단계를 거치지만, 소비자가 어떤 품목에서 어떤 효력을 중시하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가장 첫 단계다. 한국 섬유유연제 시장에 잠재력이 있다는 판단에 프로젝트가 시작됐지만, 그 첫 단계를 아무도 돌파하지 못했다. 합류한 뒤, 한국 사람들이 원하는 섬유유연제는 무엇인가에 대한 과제부터 풀었다.  
같은 브랜드여도 시장마다 콘셉트가 다른가.
생활용품이 어려운 게 지역 특화 상품이라는 거다. 사람들의 생활 습관이나 인식은 물론, 기후나 환경에도 영향을 받는다. 같은 다우니라도 시장마다 콘셉트는 물론 제품 세부도 다른다. 다른 나라에서는 빨래의 부드러움에 더 비중을 둔다면, 한국은 ‘오래 가는 잔향’이 중요했다.  
그러고 보니 ‘퍼퓸 컬렉션’ ‘실내 건조’ 등 다우니만큼 ‘향’에 집중하는 브랜드가 없었다.
핵심 문구가 ‘오래가는 상쾌함’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이 한 줄을 만들어내기가 굉장히 어려웠다.(웃음) 이 콘셉트를 바탕으로 ‘완전히 새로운 섬유유연제가 나왔다’는 인식을 갖게 하는 전략을 짰다. 당시 반응은 센세이셔널했다.  

입사 첫날 예산 짰다, 매웠던 트레이닝

9년 차에 이런 대형 브랜드 출시를 이끄는 게 일반적인가. 아니면 일을 너무 잘해서?
그렇게 믿고 싶지만 그건 아니다(웃음). P&G에서는 실무를 가장 많이 수행하는 중간 매니저가 핵심 인재로 투입되는 일이 잦다.  
이른바 ‘조기 책임제’인가.  
맞다. 지금도 기억나는 게 입사했던 첫날 받았던 일이다. 다음 회계연도 준비를 하는 1월에 입사했는데, 1일 차 직원에게 내년 한 해 동안 브랜드가 쓸 예산을 엑셀에 정리하라는 거다. 용어도 모르고 계산도 안 맞고 엉망이었는데, 끝까지 시키더라. 그 주 금요일에 완성해 제출하고 집에 가면서 ‘참 지독한 회사’라고 생각했다.(웃음)
지난 2000년에 한국P&G에 입사한 이지영 대표는 일본·싱가포르·중국 등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요직을 거치며 경력을 쌓았다. 사진 한국 P&G

지난 2000년에 한국P&G에 입사한 이지영 대표는 일본·싱가포르·중국 등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요직을 거치며 경력을 쌓았다. 사진 한국 P&G

이런 지독함 때문일까. P&G는 ‘인재 파워하우스’로 통한다. 김상현 롯데그룹 유통군 총괄 대표를 비롯해 백준혁 한국 존슨앤존슨 대표, 김기원 한국 맥도날드 대표, 한승헌 에르메스 코리아 대표 등 P&G 출신의 스타급 최고경영자(CEO)들이 즐비하다. 배경으로는 P&G의 인재 육성 프로그램이 꼽힌다. 인턴 및 신입 사원들에게도 출근 첫날부터 권한과 책임을 부여하고, 직급·연령에 관계없이 능력에 따라 해외 지사 근무 기회를 준다. ‘내부 승진제’도 고수한다. P&G의 리더는 99% 회사 내부서 육성된 인재다.

“10억 요구 정말 들어줄 줄은….”

막내로 입사해서 22년 만에 대표가 됐다.
P&G에서 근무하면서 항상 인상 깊었던 게, 글로벌이든 한국이든 그 조직에서 가장 높은 분이 한때는 모두 P&G의 신입사원이었다는 점이다. ‘내부승진제’를 회사 창립 때부터 계속 유지하고 있는데, 인턴을 통해 입사한 직원들도 임원진뿐 아니라 CEO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다.   
P&G만의 인재 육성 노하우가 있나.
노하우보다는 우리가 어릴 때부터 책임을 주면서 성장시킨 내부 인력에 대한 믿음이 있다. 2008년 아태지역 본부에서 일할 때도 가장 막내급이었던 내가 10억원 미디어 비용을 타내기도 했다. 당시 페브리즈 비즈니스가 정체기였는데, 나름대로 분석해보니 출시와 동시에 인지도가 높아졌다가 광고 예산이 부족해서 그 모멘텀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회의에서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글로벌 임원진에게 ‘1백만 달러(1million dollars)’를 달라고 요구했다. 그 자리에서 확답을 받아서 사실 깜짝 놀랐다. 나중에 물어보니 그 임원도 ‘참 당돌하다’고 생각했다더라.(웃음) 다행히 그 예산으로 3년 간 공격적 미디어 플랜을 실행했고, 성장률을 2배 정도 끌어올렸다.
P&G 싱가포르 사무실에서 동료들과 함께하고 있는 이지영 대표. 사진 한국 P&G

P&G 싱가포르 사무실에서 동료들과 함께하고 있는 이지영 대표. 사진 한국 P&G

‘이걸요? 제가요? 왜요?’의 늪에서 살아남기

열정적으로 일에 임하는 것은 좋은데, 또 요즘 조직 문화는 다르지 않나.
요즘 젊은 직원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이걸요? 제가요? 왜요?’라고 하더라.(웃음) 14년 정도 해외에서 일하다가 한국에 들어올 때쯤 ‘요즘 친구들한테 회사는 회사일 뿐이고, 열심히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런데 실제로 직접 신입도 뽑고, 마주하다 보니 오히려 ‘삶에 대한 책임감이 더 강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나 조직이 나를 지켜주는 게 아니라, 내 삶은 내 능력으로 내가 책임진다는 자세가 강했다.  
지난 2022년 열렸던 한국P&G 전사 컨벤션에서 이지영 대표가 발표를 하고 있다. 사진 한국 P&G

지난 2022년 열렸던 한국P&G 전사 컨벤션에서 이지영 대표가 발표를 하고 있다. 사진 한국 P&G

대신 보상이 확실해야 하지 않을까?
맞다. 요즘 직원들이 원하는 것은 일을 적게 하고 덜 성공하는 게 아니라, 유연하게 일을 하되 확실한 성과와 보상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유연 근무제와 일주일에 두 번 재택근무를 권장하고 있다. 사실 어떤 사람이 18시간 사무실에서 야근한들 성과가 없으면 소용없지 않나. 선택권을 주고 책임을 진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은 ‘잘 먹고 잘 사는 법, 웰빙’에 관심    

최근 이 대표가 비즈니스 성과를 내는 기본 업무 외에 가장 중점을 두는 부분은 ‘한국인 인재 육성’이다. 그는 “개인적으로 더 많은 한국 인재를 키워서 좋은 글로벌 리더로 만들어보겠다는 욕심이 있다”고 말했다.

글로벌에서는 한국 시장을 어떻게 보나.  
굉장히 역동적인 시장이고 소비자들의 니즈도 최고 수준으로 고도화되어 있다고 본다. 그만큼 빠르게 배울 수 있는 환경이라는 점에서 ‘러닝 허브’라고 표현하고 싶다. 한국 P&G가 인재 파워하우스라고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여기서 큰 인재들이 글로벌에서 인정받을 수 있도록 기여하고 싶다.  
최근 이지영 대표는 한국 P&G의 인재들을 글로벌 리더로 육성하는 데 가장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사진 홍성철

최근 이지영 대표는 한국 P&G의 인재들을 글로벌 리더로 육성하는 데 가장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사진 홍성철

요즘 하는 고민은.
배움에는 끝이 없다는 것.(웃음) 리더라면 조직에 통찰(인사이트)을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공지능(AI) 같은 신기술이 쏟아져 나오고 세상이 빠르게 돌아가는데, 고정된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게 가장 위험한 것 같다.  
주목하는 소비 트렌드가 있나.
특정 트렌드보다는 ‘잘 먹고 잘사는 법’에 관심이 있다. 흔히 말하는 ‘웰빙’인 건데, 요즘 직원들하고도 가장 많이 이야기를 나누는 부분이다. 혁신의 영감은 소비자로부터 나온다는 게 P&G의 방침인 만큼, 생활용품 기업으로서도 소비자들의 웰빙과 연결시키려 한다.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