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님 비덱이 뭔가요?’ 잡아뗀 최순실, 난 믿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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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씨. 중앙포토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씨. 중앙포토

박근혜 회고록 - 국정 농단편

 “대통령님, 지금 뉴스 보고 계십니까?”
2016년 10월 24일 저녁 식사 후 업무 지시차 안종범 정책조정수석에게 전화를 걸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은 안 수석의 다급한 목소리를 접했다. 당시 JTBC에서 최서원(개명전 최순실)씨가 박 전 대통령의 연설문을 수정했다며 관련 컴퓨터 파일을 보도한 것을 두고 한 말이었다. 정국은 이후 급격히 요동쳤고, 박 전 대통령은 “상황은 내가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고 회고했다. 박 전 대통령은 “2016년 10월 24일 오전부터 24시간은 내 인생에서 가장 긴 하루였다. 이 24시간을 기점으로 내 운명의 항로가 완전히 달라졌다”고 술회했다.

이날 오전 박 전 대통령은 국회에서 ‘임기 내 개헌’ 추진을 제안했다. 정치권은 크게 술렁였고, 이때만 해도 개헌이 모든 이슈를 잠식하는 듯했다. 하지만 이날 저녁 최서원씨 관련 보도가 나오면서 흐름은 뒤바뀌었다. 이튿날 대국민사과에도 여론은 급속도로 악화했다. 이날부터 국회에서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2016년 12월 9일)되기까지는 불과 46일이 걸렸다.

박 전 대통령은 최서원씨에 대해 “‘비선 실세’라는 거창한 타이틀로 포장되기는 했지만, 의상·생필품 구매와 가끔 연설문에 자신의 의견을 보태는 정도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최 원장이 그런 엉뚱한 짓을 벌이고 다닐 줄 몰랐다. 행적을 정확히 파악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던 것이 큰 실책이었다”고 후회했다.

1974년 제1회 새마음 제전에 참석한 최서원씨(왼쪽부터)와 박근혜 전 대통령, 이명박 전 대통령. 사진 국가자료원

1974년 제1회 새마음 제전에 참석한 최서원씨(왼쪽부터)와 박근혜 전 대통령, 이명박 전 대통령. 사진 국가자료원

최 원장이 독일에 비덱 스포츠라는 회사를 세워 삼성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보도가 나온 2016년 10월 중순 무렵, 박근혜 전 대통령은 최 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 언론에 보도되고 있는 비덱이라는 회사를 아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최 원장은 “대통령님 비덱이 뭔가요?”라고 반문하며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박 전 대통령은 “그녀가 설마 나에게 거짓말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이것은 박 전 대통령과 최 원장의 마지막 통화였다.

박 전 대통령은 “최 원장에 대한 언론 보도가 처음 나왔을 때 사실관계를 확실하게 조사하고 보고를 받았다면 단호한 조치를 취했을 텐데 그러지 못한 것이 가장 후회스럽다. 그랬으면 그 이후 벌어질 온갖 국정 혼란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했다”고 아쉬워했다.

박 전 대통령을 뇌물죄로 기소하면서 삼성에게 최 원장 일가를 도우라고 했다는 일각의 의혹도 전면 부인했다. 검찰은 박 전 대통령이 2014년 9월 15일 대구 창조경제혁신센터 개소식에서 이재용 당시 삼성전자 부회장을 만나 삼성이 대한승마협회를 맡아 정유라를 지원해주면 그 대가로 경영권 승계를 위해 필요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건을 도와주는 ‘묵시적 청탁’을 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박 전 대통령은 “검찰이 나를 뇌물죄로 기소하기 위해 만든 무리한 억측에 지나지 않는다”며 “이 부회장으로부터 그런 부탁을 받은 적도 없고 내가 관여한 것도 없다. 이 부회장에게 정유라씨를 언급하면서 도와 달라고 한 적은 맹세코 없다”고 반박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5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회계부정·부당합병 관련 1심 선고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이날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2부(부장판사 박정제)는 이 회장에 대해 “이 사건 공소 사실 모두 범죄의 증명이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뉴스1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5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회계부정·부당합병 관련 1심 선고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이날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2부(부장판사 박정제)는 이 회장에 대해 “이 사건 공소 사실 모두 범죄의 증명이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뉴스1

그러면서 “기업이 사회공헌이나 자선을 베풀었을 때 국정기조 중 어느 하나와는 결부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식의 논리라면 역대 대통령 중 어느 누구도 대가성 논란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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