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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기억] 사진으로 슬픔과 화해하기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865호 31면

‘슬픔의 질감’ ©이언옥

‘슬픔의 질감’ ©이언옥

슬픔을 만지면 어떤 느낌일까. 촉촉할까, 보풀처럼 부슬거릴까. 차갑지 않고 어쩌면 따스한 온도를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언옥의 사진 ‘슬픔의 질감’ 시리즈는 마음속 감정인 슬픔을 사진으로 시각화함으로써, 그 감정을 감각하고 공감할 수 있게 한 작업이다.

살아오는 동안 느꼈던 숱한 슬픔들. 원인이 된 구체적 기억들은 이미 사라졌으나, 느낌과 정서는 남아서 예기치 않은 순간에 문득 나타나곤 했다. 아련하게 남은 슬픔의 느낌과 정서가 주변을 둘러싸는 듯한 순간을 만날 때면,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 커튼을 젖히고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창을 내다보는 소녀의 뒷모습처럼.

카메라는 아날로그를 사용했다. 대상을 정보로 처리하는 디지털과 달리 빛을 물성으로 받아들이는 필름의 특성이 좋았기 때문이다. 일반 인화지 대신 종이를 선택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선명하게 담아내는 인화지와 달리, 초점이 흐리기도 하고 형체의 일부가 사라지기도 한 이미지들이 기억과 닮아있었다.

그렇게 얻은 사진들에 스캐노그라피와 라이트박스 촬영기법을 적용했다. 깜깜한 밤에 라이트박스를 켜고 그 위에 이미지가 담긴 종이를 올려놓으면, 종이의 질감과 태양광의 색온도가 더해지면서 따스해졌다.

때로는 종이 사진 속 풀 이파리 끝에, 동그랗고 작은 구멍을 뚫었다. 구멍 사이로 라이트박스의 빛이 들어오면서, 이파리 끝에 동그라미들이 물방울로 맺혔다. 날카로운 핀으로 사진 속 꽃의 가는 줄기를 따라 그리면, 가늘고 연약한 줄기들이 빛을 내며 환해졌다. 사진의 여러 기법과 자신만의 방식으로, 처음 포착한 슬픔의 이미지에 개입했다.

이언옥은 카이스트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업해 디자이너로 일하다, 지금은 부산의 한 작은 동네에서 청소년을 위한 공부방을 꾸려가는 독특한 이력의 사진가다. 학창시절을 관통하고도 다시 맞닥뜨린 도시와 기업의 경쟁 구도가 싫어서 자신만의 ‘고치(공부방 이름)’를 택했고, 자기 치유의 한 방편으로 사진을 시작했다.

작가는 슬픔을 시각언어로 재구성하는 작업을 통해, ‘나의 슬픔과 화해하는 힘’을 얻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사진의 여러 역할이다.

박미경 류가헌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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