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비싸고 맛있는 음식이라도 접시가 없으면 제대로 그 맛을 즐기기 어렵다. 반도체도 마찬가지다. 삼성전자·엔비디아·인텔이 공들여 최첨단 칩을 만들어도, 기판에 장착되지 못한다면 소비자들은 반도체가 제공하는 편리함을 누릴 수 없다. 반도체 기판이 ‘빛나는 조연’으로 불리는 이유다.
삼성전기 반도체 패키지기판 라인 가보니
지난 2일 세종시 연동면에 있는 삼성전기 세종사업장. 공장 안에선 회로를 새긴 뒤 도금 공정을 마친 구릿빛 기판이 줄줄이 생산라인을 통과하고 있었다. 여기에 초록빛 잉크를 입히면 패키지 기판이 완성된다. 제조과정에서 기계·화학·전자·재료공학이 총동원되는 ‘공학의 종합예술’이다.
이 초록색 기판의 정확한 명칭은 인쇄회로기판(PCB)이다. 전기신호가 지나가는 회로가 인쇄된 판이다. 사람 눈에 편하고 불량률을 줄이기 위해 주로 녹색 잉크를 쓰지만 다른 색상으로 만들 수도 있다. 반도체 칩을 두뇌에 비유한다면 기판은 뇌에서 전달하는 정보를 신체 각 기관에 전달하는 신경과 혈관에 해당한다.
이곳에서 만들어지는 기판이 스마트폰과 태블릿PC·자동차 전장에 장착된다. 삼성전기 관계자는 “자동차 기판 하나라도 불량을 일으키면 자칫 인명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면서 “기판 사업에서 생산량이나 수율(생산품 대비 정상품 비율)보다 중요한 것이 신뢰성”이라고 말했다.
이 회사 세종사업장에선 반도체 패키지 기판 단일 제품을 생산한다. 반도체 패키지 기판은 메인보드에 고성능 반도체를 앉히기 위한 중간다리 역할을 한다. 반도체 칩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려면 칩과 메인보드가 연결돼 전기적 신호를 정확하게 입·출력해야 한다. 나노미터(㎚·1㎚=10억 분의 1m) 단위 칩과 그보다 넓은 마이크로미터(㎛·1㎛=100만 분의 1m) 단위 메인보드의 회로 폭 차이를 연결해 제 성능을 내기 위해서는 패키지 기판이 필요하다.
원래 기판 위에 반도체 칩이 하나 올라가는 단순한 구조였지만 반도체 성능이 발전하면서 기판의 면적도 커지고 층수도 늘어나는 추세다. 기판의 각 층을 연결해주는 구멍 크기부터 A4 용지 두께의 2분의 1 수준으로 얇아 정교한 기술력이 필요하다. 삼성전기는 1997년 패키지 기판 생산에 첫 성공하며 일본산 기판 독점 시대를 끝내고 고성능 기판 시장에서 일본·대만 기업과 경쟁하고 있다. 기판 위에 올리던 반도체를 기판 층 사이에 묻어 두께는 줄이고 성능은 올린 임베디드 기술 분야에서도 세계 최고 수준으로 꼽힌다.
삼성전기는 플래그십(최상위) 스마트폰의 두뇌 역할을 하는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용 패키지 기판 시장에서 세계 1위를 달리고 있다. 삼성전자가 자체 설계·제작하는 엑시노스는 물론 퀄컴의 스냅드래곤 칩 등에도 들어간다.
사업장 한쪽에선 내년 5월 준공을 앞둔 신공장 부지 골조 공사가 한창이었다. 이곳에서 차세대 중앙처리장치(CPU)로 주목 받는 ARM 기반 프로세서용 패키지 기판이 생산될 예정이다. 기존 x86 방식 CPU에 비해 전력 소모가 적고, 발열 현상이 크게 개선돼 시장 전망도 밝다. ‘괴물 칩’으로 불리며 애플 맥북에 탑재됐던 M2 칩 역시 ARM 기반으로 설계됐다.
전 세계 반도체 패키지 시장은 올해 106억 달러(약 14조원)에서 2027년 152억 달러(약 20조원)까지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심규현 삼성전기 패키지제조기술팀장(상무)은 “내년 상반기부터는 반도체 시장이 다시 살아날 것으로 본다”면서 “반도체 기술 발전 속도에 발맞춰 더 미세한 기판 개발·양산에 주력하겠다”고 말했다.
◆1일로 창립 50주년=한편 삼성전기는 지난 1일 경기도 수원사업장에서 장덕현 사장 등 임직원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 50주년 기념식을 열었다. 장 사장은 “삼성전기 성장의 역사는 구성원 모두의 피땀 어린 노력과 열정 덕분”이라며 “엔지니어링 주도권과 혁신 문화, 디지털 퓨처를 키워드로 미래를 준비하자”고 강조했다.
이날 삼성전기는 새 비전 슬로건으로 ‘The Core of a Digital Future’를 발표했다. 이 회사 관계자는 “‘새로운 디지털의 미래, 그 중심에 삼성전기 제품이 있다’는 의미”라며 “사내 공모를 통해 직접 선정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