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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후남의 영화몽상

요약을 거부하는 영화 ‘오펜하이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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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이후남 기자 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
이후남 문화선임기자

이후남 문화선임기자

영국 출신으로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크리스토퍼 놀런은 한국에선 ‘천만 감독’이다. 그의 영화 가운데 ‘인터스텔라’는 우주와 시간에 대한 제법 난해한 과학이론이 어른거리는 데도 국내 극장가에서 1000만 넘는 관객을 모았다. 어쩌면 그래서 더 흥행이 잘 됐을지 모른다. 저명한 물리학자의 자문까지 받은 영화인 만큼, 장차 과학자가 될지 모를 자녀에게 권할 만한 영화로 여겨졌을 수 있다.

놀런의 최신작 ‘오펜하이머’는 이와는 좀 다르다. 이번에는 본격적인 과학자 이야기인데, 영화를 봐도 물리학 지식이 크게 얻어지는 것 같지는 않다. 게다가 사생활까지 낱낱이 따지며 주인공에게 발가벗겨지는 기분을 안겨주는 청문회의 한 대목과 그 사생활 장면은 묘사가 꽤 적나라하다. 15세 관람가 영화이지만, 청소년 자녀와 나란히 앉아서 보기 편한 장면은 아닐 듯싶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 ‘오펜하이머’. [사진 유니버설 픽처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 ‘오펜하이머’. [사진 유니버설 픽처스]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뛰어난 과학자의 놀라운 성취라는 결말로 달려가지 않는다. 실존 인물인 주인공 오펜하이머의 삶이 실제 그랬기 때문이다. 그는 원자폭탄 개발이라는 엄청난 위업에 성공했지만 이후 그 위험성을 경고하고 나섰고, 공산주의자들과 가까웠던 그의 전력은 당시 미국에 불어닥친 매카시즘의 광풍 속에 추락의 빌미가 된다.

그렇다고 시대에 상처 입은 고결한 과학자로만 보이지도 않는다. 이를 포함해 그는 상상 이상으로 여러 면에서 복잡한 사람이었다. 영화에도 그려지는데, 영화가 원작으로 삼은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를 펼쳐보면 더 실감 난다. 이 두툼한 평전은 부잣집에 태어나 남다른 교육을 받고 유학 생활을 거쳐 과학자로 명성과 업적을 쌓았다는 식의 전개 대신 가족 관계든, 성장기 경험이든, 결혼 전후의 연애든 뭐 하나 한 줄로 요약하기 힘든 인물의 복잡다단한 면모를 꼼꼼하고 상세하게 전한다. 자료 조사 시작 이후 25년 만에야 평전이 완성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싶다.

블록버스터에 흔히 기대하는 스펙터클과 거리를 두는 것도 이 영화의 특징이다. ‘트리니티’라고 이름 붙인 원폭 실험의 성공은 이 영화의 가장 큰 볼거리일 텐데, 정작 영화의 가장 극적인 순간은 그 이후 다른 데서 벌어진다. 비좁은 사무실을 포함해 각기 다른 시기 두 곳의 청문회장에서, 말과 연기의 격전을 통해서다. 흑백과 컬러를 교차하며 이야기를 시작한 의도가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놀라운 건 그래서다. 복잡다단한 삶을 쉽게 윤색하지 않고 가능한 한 충실히 포착하면서도 그의 삶이 웅변하는 바를 뚜렷이 전한다.

영화를 보고 나니 그 삶을 한 문장으로 옮기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그럼에도 그 이름을 자주 떠올리게 될 것이다. 새로운 과학과 기술이 부상할 때마다 그 위력과 파장을 숙고하는 대신 행여 뒤처질까 전전긍긍하기만 하는 모습을 마주할 때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