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엔비디아는 시가총액 1조 달러(약 1323조원)를 돌파한 최초의 반도체 기업이 됐다. 시장에서 개당 4만 달러(약 5340만원)를 호가하는 고성능 인공지능(AI) 칩 ‘H100’ 덕분이다. 연산을 처리하는 시스템(로직) 반도체인 그래픽처리장치(GPU)와 데이터를 저장하는 고대역폭 메모리 반도체(HBM)가 마치 하나의 칩처럼 연결된 H100의 설계구조는 오늘날 반도체 시장의 ‘게임의 룰’이 바뀌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H100의 경우 전체 설계는 엔비디아가, 실제 생산과 패키징은 TSMC가, HBM은 SK하이닉스가 각각 맡았다.
최첨단 반도체 산업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인공지능 시대가 열리면서 새로운 반도체가 필요해졌고, 이를 현실에서 구현하기 위해 제조 방법은 물론 설계·소재·부품·장비·패키징까지 공급망 전반에서 일대 변화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게임의 룰은 패키징에서부터 변하고 있다. 패키징은 원래 웨이퍼(반도체 원판) 상태의 칩을 전자기기에 부착할 수 있도록 가공해주는 반도체 제조 공정의 뒷부분을 뜻한다. 하지만 인공지능 구현을 위해 기기 속에서 저마다 역할을 해오던 CPU(중앙처리장치)와 GPU, D램 등 서로 다른 칩을 마치 한 몸처럼 구동시켜야 하게 되면서 패키징의 위상이 완전히 달라졌다.
성격이 다른 반도체를 고층 건물처럼 쌓아 올려 엄청난 성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주는 첨단 패키징 기술 시대가 막을 올린 것이다. 엔비디아가 내년부터 생산에 돌입하는 차세대 AI 칩 ‘GH200’ 역시 CPU와 GPU, 메모리 반도체가 하나의 칩으로 합쳐진 주상복합 구조의 반도체다.
엔비디아·AMD·인텔 등 시스템 반도체만 만드는 곳이나 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 등 메모리 반도체를 만드는 기업은 많지만, 이들 칩을 하나로 이어줄 수 있는 기술력을 가진 곳은 많지 않다. 업계에서는 결국 TSMC·삼성전자·인텔 3곳 정도 만이 고난도 패키징 기술을 구현할 수 있는 기업으로 남을 것으로 본다. 미래 반도체 시장의 최고 격전지 중 하나로 꼽히는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분야에서 패키징 기술을 장악한 기업이 결국 최후의 승자가 될 것이라 점쳐지는 이유다. 업계 관계자는 30일 “이제는 ‘칩을 얼마나 잘 만드느냐’에서 ‘얼마나 여러 칩을 잘 쌓아 올릴 수 있느냐’의 싸움이 된 것”이라 말했다.
전 세계 패키징 시장 규모는 2025년까지 649억 달러(약 86조원) 규모로 커질 것으로 예측된다. 하지만 첨단 패키징 기술을 주도한 회사가 실질적으로 반도체를 만드는 전(前)공정까지 모두 싹쓸이하는 파운드리 사업 구조를 고려하면 사실상 수백조원 규모의 시장이 첨단 패키징 기술에 달린 셈이다.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는 건 TSMC다. TSMC는 가장 먼저 패키징 기술의 잠재력을 내다보고 관련 기술에 투자해 ‘CoWoS’로 불리는 첨단 패키징 기술을 내세워 엔비디아 물량을 독점 수주해 레이스 초반 선두로 치고 나갔다. 전 세계 절반이 넘는 반도체를 위탁 생산하고 있는 만큼 앞선 패키징 능력으로 끝까지 시장을 장악하겠다는 전략이다. TSMC는 이미 대만에 5개의 패키징 전문 공장을 보유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발상의 전환으로 추격에 나섰다. 경쟁사 중 유일하게 메모리 반도체를 생산하고 있다는 점에 착안해 자사 메모리 반도체를 칩 생산과정에서 묶어 함께 패키징 해주는 턴키(일괄 진행) 서비스를 최근 시작했다. 삼성은 앞서 상당수 패키징 작업을 대만 등 외부 후공정 전문 업체에 맡겼지만, 이제는 첨단 패키징 기술을 직접 수행하는 쪽으로 선회했다. SK하이닉스 역시 AI 반도체에 들어가는 HBM을 생산하는 만큼 패키징 기술을 통해 자사 메모리 반도체 성능을 끌어올리는 연구에 투자 중이다.
인텔은 개방형 파운드리 시스템을 들고 나왔다. 고객사가 인텔의 패키징, 조립, 또는 테스트 공정만 이용할 수 있도록 표준화된 서비스를 나눠서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인텔 관계자는 “TSMC나 삼성전자가 만든 칩도 인텔에 가져오면 얼마든지 나머지 작업을 해주겠다”고 말했다. TSMC가 생산한 칩에 삼성의 메모리 반도체를 붙이면 인텔이 패키징을 해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여기에 최근 인텔이 자체 개발한 3D 반도체 적층기술인 ‘포베로스’를 내세워 패키징 경쟁에 뛰어들었다.
관련 기술이 이제 막 개화하고 있는 만큼 업계 기술 표준을 주도하는 진영이 앞서나갈 가능성이 크다. 인텔은 미 정부와 함께 국가 첨단 패키징 제조 프로그램(NAPMP)에 참여해 패키징 기술 표준화를 주도하고 있다. 미국은 지난해 8월 칩스법(반도체지원법)을 시행하면서 반도체 패키징 기술과 관련해 이미 우리 돈 3조원이 넘는 예산을 편성했다.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석학교수는 “첨단 패키징은 지금까지 업계에 없었던 전혀 새로운 영역”이라면서 “모두가 이제 막 출발선에 선 만큼 기술 리더십을 먼저 잡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우리 정부도 선도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지원에 나섰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최대 5000억원 규모 예산을 투입해 첨단 패키징 기술을 확보하기 위한 예비타당성조사 준비 작업을 진행 중이다. 아직 전체 시스템반도체 분야 R&D 투자 중 첨단 패키징 비중은 0.5%에도 미치지 못한다. 김정호 KAIST 전기전자공학부 교수는 “결국 최첨단 패키징 경쟁은 최전선에 있는 기업이 해내야 한다”면서도 “미국과 대만보다 부족한 첨단 패키징 장비와 관련 인력 등 기초체력이 길러질 수 있도록 지원하는 데 정책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라 말했다.